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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인삼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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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hapter 1. 인삼은 생명의 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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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2mark 인삼혁명, 삼밭을 일구다

산에서 채취하던 인삼을 밭에서 기른다? 이는 인삼 역사에서 거의 혁명적인 변화로 꼽힌다. 우리나라에서 인삼을 언제부터 재배했는지 그 시기는 정확하지 않다.

조선 시대 문집과 농업서에 언급된 인삼 재배 기술을 토대로 18세기 초반에 시작해서 중·후반기에 널리 보급된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반면 일본은 사카노우에 노보루(坂上登)가 1737년 집필한 《인삼보(人參譜)》와 1747년에 집필한 《인삼경작기(人蔘耕作記)》2)를 근거로 일본이 재배의 원조라고 주장한다.

사카노 우에 노보루는 1759년에 막부 어용계에 임용돼 니코(日光) 산 아래에 있는 인삼 시험장에서 감시와 시험 재배를 담당한 인삼 전문가다. 일본의 인삼 관련 농서는 1770년 영조(英祖)의 지시로 편찬한 《어제삼기산지(御 製蔘芪山識)》보다는 빠르다.

그러나 《인삼보》 서문을 보면 “당시에 그가 기록하는 인삼 이야기가 그 이전에 밝혀져 체계화돼 있던 조선 인삼의 재배·제조 요령과 같았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의 인삼 재배가 일본보다 이른 18세기 이전에 이미 시작됐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1719년 일본으로 건너간 조선통신사에게 일본측이 재배 농법을 탐문해 이에 대한 문답이 오간 기록도 18세기 이전에 조선에서 인삼이 재배됐음을 짐작하게 한다. 인삼 재배에 대한 문답이 오간 것은 이미 조선에서 인삼을 재배한다는 정보를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 한 수 위의 인삼 재배 기술

18세기 초까지도 일본은 인삼의 생태를 잘 몰라 인삼을 상세히 그려 보내라고 쓰시마(대마도)에 지시할 정도였다. 쓰시마 종가 문서에는 1719년 막부에서 쓰시마사무소에 인삼 그림을 그려 보내라고 지시한 기록이 있다.

18세기 후반 들어서는 조선 지식인들의 문집과 농사서에 가삼(재배삼)이 등장한다. 인삼처럼 까다로운 다년생 식물은 오랜 기간 경험이 쌓이지 않고서는 그 특성을 파악할 수 없다.

따라서 오랜 기간 시행착오를 거쳐 결실을 맺은 후 재배법이 공식 등장 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18세기 조선 문헌에 담긴 종삼법, 토양 고르는 법, 병 충해 방제법, 보관법 등 인삼 농사 기술은 지금도 그대로 통용될 정도로 정교하다.

수십 년간의 경작 경험과 실험이 바탕이 되지 않고는 정립할 수 없는 농법이다. 이렇게 볼 때 조선에서의 인삼 농사는 아무리 늦어도 17세기 후반에 시작됐음을 추정할 수 있다.

인조 14년(1636년) 제4차 통신사 일행
▲ 인조 14년(1636년) 제4차 통신사 일행이 에도 성에 들어가는 모습을 그린 행렬도. 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 산삼이 밭으로 내려온 까닭은?

조선에서 인삼 재배를 시작한 경위는 대체로 두 가지로 유추해볼 수 있다. 첫째, 인삼 공납을 둘러싼 폐단인 삼폐(蔘弊)가 심각해지면서 인삼을 구하기 위해 암암리에 재배하기 시작했을 것이라는 설이다. 인삼에 대한 수요가 급증하면서 자연삼만으로는 충당이 어려웠다.

수요와 공급의 불균형으로 특정 지역에 부과된 삼공(蔘貢)의 양을 달성하지 못하자 이를 채우는 과정에서 많은 폐단이 발생했다. 산삼이 고갈되면서 삼폐는 더욱 심해졌고 이것이 인삼 재배로 이어 졌을 것이라 추측된다.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에는 평안도 강계를 비롯한 각 지역 관찰사가 삼폐의 실상을 호소하는 보고가 많이 나온다.

산삼이 귀해짐에도 지역 수령들의 가혹한 삼공 요구와 가렴주구로 백성들이 곤욕을 치르고 있음을 고발한 것이다. 산삼이 귀해진 사정을 보여주는 기록도 있다.

1707년 이이명(李頤命)은 “근래 중외 (中外)의 인삼이 몹시 귀해져 공사(公私)의 수용(需用)이 거의 바닥이 나는 데 이르렀다”라는 장계를 올렸다. 인삼 수요가 증대하면서 남획이 이루어져 인삼이 고갈되는 상황을 보여주는 것이다.

나아가 그는 “관서(關西)의 세포(稅布)와 공목(貢木)을 강계(江界)로 들여보내 여기에서 시가(時價)에 따라 인삼을 구입하여 호조(戶曹)에 수송해서 국가의 수용(需用)에 대비하게 해야 한다”는 나름의 대책을 제시하기도 했다.3)

둘째, 인삼이 농가의 큰 수입원이 되므로 유망 품목으로 이를 재배하기 시작했을 수 있다. 산삼은 구하기 점점 힘들어진 데다 인삼이 시중에서 수요가 크게 늘어 가격이 급등했기 때문이다.

정조 원년(1777년)에 호조판서 구윤옥(具允鈺)이 “삼가(蔘價)가 크게 뛰어오른 것은 공용(公用)이 많은 것 때문이 아니라 근래 사가(私家)에서 인삼을 사용하는 것이 전보다 10배나 많아졌기 때문이다”라고 토로 한 기록이 《일성록(日省錄)》에 나온다.4)

인삼 채취용 곡괭이
▲ 인삼을 재배하는 농가에서 인삼을 수확할 때 쓰는 인삼 채취용 곡괭이. 일반 농가에서는 거의 쓰지 않는다. 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재종천혈판(栽種穿穴板)
▲ 재종천혈판(栽種穿穴板)은 인삼씨를 파종할 때 쓰는 농기구로 판 아래에는 인삼씨를 심기 위해 구멍을 내는 촉이, 판 위쪽에는 손잡이가 달려 있다. 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또 16, 17세기 들어 대청, 대일 무역에서 인삼이 큰 비중을 차지하면서 대량의 인삼을 해외로 수출해 값이 급등하자 너도나도 상업적 재배에 나섰을 가능성이 있다.

정약용(丁若鏞)이 《경세유표(經世遺 表)》에서 농민들에게 수익이 높은 작물 재배를 권고하는 당시 상황을 감안해볼 때 인삼 역시 수익성이 높은 상품 작물에 속해 재배가 성행했을 것이다.

1935년 대구전매지국에서 인삼 경작에 관한 주의 사항
▲ 1935년 대구전매지국에서 인삼 경작에 관한 주의 사항을 설명해놓은 전단. 출처 : 박물관 포털 e뮤지엄

♣ 400여 년을 이어온 조상들의 유산

인삼 재배는 삼폐에서 비롯돼 나중에 수요와 공급을 맞추는 시장 경제에 의해 확산된 것으로 짐작된다. 시대적 상황과 문헌상의 기록으로 미루어볼 때 인삼은 삼폐가 극심했던 14세기 후반 또는 15세기 초에 극소수이기는 하지만 산양삼으로 재배가 시도된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과 같은 삼포 재배법은 17세기에 농가에 알려졌고, 18세기 들어 보편화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어 18세기 후반 최대 인삼 시장인 중국, 일본과의 교역이 활발해지면서 대량 생산으로 이어졌다. 인삼은 지금도 전문 인삼 농사꾼이 아니면 재배하기 어렵다.

당시로서는 고난도의 기술이었던 인삼 재배법은 국가 중심으로 개발된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 일반 백성들의 경험과 노력으로 발전해왔다. 선조들이 물려준 자랑스러운 유산 덕분에 우리는 여전히 인삼 종주국의 명성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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