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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hapter 1. 인삼은 생명의 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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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2mark 인삼 재배는 언제, 어디서 시작됐을까?

인삼 재배가 가능해지면서 인삼은 농가의 고부가가치 작물로 자리를 잡아갔다. 그렇다면 그 첫 재배지는 어디일까. 여전히 의견이 분분한 가운데 화순, 풍기, 금산이 원조로 거론되고 있다.

♣ 화순 동복현 기원설

20세기 초 김택영(金澤榮)이 편찬한 소호당 문집 《홍삼지(紅蔘志)》에 인삼 재배의 기원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김택영은 개성 출신의 부모와 한양의 통역관으로 부터 보고 들은 내용과 《문헌비고(文獻備考)》의 속찬위원으로 참여하면서 조정 에서 얻은 문헌을 근거로 “전라도 동복현에 살던 김진사의 며느리인 어떤 여자가 산에서 산삼 종자를 얻어 밭에 심었는데 최 씨 성을 지닌 사람이 이를 전파하였고 이로써 가삼의 이름이 생겨났다”고 설명했다.

실제 《문헌비고》(영조 46년, 1770년)에 전라도 동북면 최 씨라는 사람이 파종해 가삼을 재배했다는 기록이 있다. 김택영의 주장은 이를 근거로 한다.

전라도 동복현은 현재 전남 화순군 동복면으로 모후산이 있다. 장지연(張志淵)도 《위암문고(韋庵文稿)》에서 명릉 즉 숙종대(1674~1720년 재위) 이 같은 일이 일어났고 개성 사람에게 인삼을 재배하는 방법이 전파됐다고 부연 설명까지 했다.

1914년 간행된 《중경지(中京誌)》는 개성의 산물로 인삼, 구기자, 송이, 백자, 백당 등을 소개하며 비슷한 내용을 전했다. 《중경지》는 김택영의 글을 참고해 ‘토산편’을 기술했음을 밝혔는데 이를 통해 화순 기원설이 김택영으로부터 시작 됐음을 알 수 있다.

이 당시의 《중경지》는 1648년에 간행된 《송도지(松都誌)》와 1881년 개성 유수 조경하(趙敬夏)가 이를 증보한 《중경지》를 바탕으로 추가 사실을 담았다. 특히 앞서 말한 《홍삼지》는 인삼의 종삼법, 홍삼의 세와 교역 등에 관해 1908년까지의 사실을 자세히 기록했다.

이 같은 문헌을 근거로 화순군은 인삼 시배지가 화순군임을 주장한다. 산삼을 캐러 들어가기에 앞서 제사를 지내는 개삼제가 일부 심마니를 중심으로 매년 10월 모후산에서 열리고 있다.

♣ 풍기 기원설

풍기를 근거지로 한 영남 기원설도 전해진다. 인삼 재배가 풍기 군수 주세붕 (周世鵬)으로부터 시작됐다는 설로 문헌적 근거 없이 전설로만 전해올 뿐이다.

1541년 경상도 풍기 군수에 부임한 주세붕이 인삼 때문에 도탄에 빠진 사람들을 구제하기 위해 재배법을 개발해 농민들에게 전수했다는 주장이다. 10년 후 황해도 관찰사로 부임해 그곳에서도 인삼을 재배한 것으로 전해지지만 기록으로 남아 있지 않고 구전만 된다.

풍기에서는 이처럼 기록이 없는 이유에 대해 산삼을 재배삼으로 대납했음이 알려지면 화를 입을 것을 우려해 기록을 남기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본다.

주세붕 군수의 인삼 재배설과 비슷한 내용은 훗날 유득공(柳得恭)이 쓴 《고예당 필기(古芸堂筆記)》 ‘권3’에 나온다.

“해마다 약포에서 가삼을 많이 판다. 영남이 재배한 것이다. 산삼에 비해서 성미가 못하지만 가격은 3분의 2가 싸다. 복약하는 자들이 편하게 여긴다. 충주 심홍경이 와서 말하기를 충주 사람들 또한 배워서 재배한다고 하였다…영남인은 밭에 재배하기를 채소와 다름이 없게 한다. 이로움이 소재하는 곳에 사람들이 다투어 모풍(慕風)하는데 소를 팔고 밭을 팔고 삼으로 바꾸어 종하여 왕왕 부유하게 되기도 한다. 이러한 풍이 영을 넘어서 충주까지 이르렀다”5)고 기술한 것이다.

문헌은 영남 지역에서 시작된 인삼 재배가 유행처럼 번져 충청도 충주 지역 주민들까지 뛰어들었다고 소개했다. 당시는 산삼이 귀한 데다 중국, 일본과의 교역으로 수요가 막대해 삼폐가 심한 실정이었다.

이에 유득공은 “삼은 특별히 산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종(種)하여도 얻을 수 있다. 사람들이 즐겨 종하는 것 이면 어찌 팔로(八路)에 두루 쓰지 않을 것인가. 삼에 여유가 있으면 백성이 본래 곤궁하지 않을 것이니 다행이 아닐 것인가. 내가 그러므로 그 방법을 기록 하여 마음이 있는 자들이 보게 하려 한다”며 가삼 재배법을 정리한 이유가 삼폐의 해소에 있음을 밝혔다.6)

서호수(徐浩修)의 《해동농서(海東農書)》에도 비슷한 기록이 있다. “금속(今俗)에 혹은 산삼본(山蔘本)을 이종(移種)하거나, 혹은 취자(取子)하여 재배하는데, 영남(嶺南)에서 시작하여 국내에 퍼졌다. 모두 가삼(家蔘)이라고 칭한다”라고 가삼 재배가 영남에서 시작해 다른 지역까지 급속도로 퍼져나갔음을 기술했다.7)

영남은 본래 삼국 시대부터 ‘나삼(羅蔘)’이라 하며 중국에서도 품질을 높이 인정한 인삼의 산지다. 여기에서 나삼은 산삼이다. 나삼을 마구 캔 까닭에 조정에 바칠 삼이 필요해진 영남 지역 주민들이 인삼을 재배한 것으로 추측된다.

풍기 인삼 개삼터.

♣ 금산 기원설8)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는 전국 330개 군현의 약재 산출지를 기록한 것이 나온다. 그런데 금산은 여기에 등장하지 않는다. 다만 중종 25년(1530년)에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진산군이 인삼 산출지로 기록 돼 있다.

금산과 인접한 진산군은 1814년 금산군으로 편입됐는데 현재의 금산군 진산면이다. 따라서 이는 금산에서 인삼이 산출됨을 보여주는 기록이다. 하지만 《세종실록지리지》에 등장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산삼이 풍부하지는 않았 던 것 같다.

금산은 뒤늦게 인삼 재배가 성행해 현재와 같은 인삼의 고장으로 자리 잡게 됐을 것으로 보인다. 금산의 인삼 재배 기원에 대한 정확한 문헌 기록은 없다. 풍기와 화순이 《문헌비고》 《중경지》 등에 전해지는 것과 달리 금산은 언론을 통해 설로 전해진다.

<매일신보>에 따르면 “1460년경 금산면 상옥리에 김 씨 성을 가진 과부가 진악산에 서삼지오엽에 선홍색으로 달린 열매를 따 정원에 심었다. 이듬해 봄에 새싹이 나 이를 몇 년 동안 재배했다. 김 과부의 외동아들이 열 살 때 불치병에 걸려 백약이 무효했는데 재배하던 인삼 뿌리를 먹였더니 불치병이 나았다. 이 소문이 전파돼 인삼을 재배하는 농가가 증가하였다”9)고 한다.

<매일신보>는 인삼 재배 설화를 주인공만 바꾼 채 또 다른 내용으로 싣기도 했다. “금산 읍내 중도리에 사는 강방환의 6대조 강득무가 진악산 아래에 있는 금산면 계진리에 거주하던 중 관남봉에서 산삼을 채취해 그 열매를 따다가 재배를 시작했다”10)고 정리한 것이다.

금산의 인삼 유래를 전한 <매일신보> 기사는 화순의 인삼 재배 설화와도 약간 비슷하다. 1929년 금산군 산업 기수였던 호소카와 간지(細川治一)는 “김립이라는 사람이 1770년경 개성으로부터 인삼 종자를 가지고 와 묘포를 만들어 시작했고 성과가 좋아 육묘를 개성 인삼업자에게 판매하면서 시작되었다”고 구체적으로 소개했다.11)

호소카와의 말처럼 금산은 18세기 후반 인삼 산지로 부상했을 가능성이 있다. 18세기 말에는 영남과 마찬가지로 인삼 재배법이 보급되던 시기였고 여러 지역으로 확산되고 있었다.

18세기 말에 편찬된 《금산군읍지(錦山郡 邑誌)》에는 인삼이 주요 물산으로 등재돼 있다. 전에는 전혀 보이지 않던 품목이 새로 등장한 것은 뒤늦게 재배가 성행했음을 의미한다. 현재 금산군 남이면 성곡리에는 인삼 재배를 처음 시작했다는 개삼터가 있다.

금산군 개삼터 공원
▲ 금산군이 조성한 개삼터 공원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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