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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hapter 22. 태국의 음식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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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2mark 전통 동남아의 식품

앞에서 동남아 음식문화의 구조적 특징을 개략적으로 살펴보았거니와, 그것은 토착적인 동남아의 식생활이 시대를 거치면서 겪은 다양한 대내적, 대외적 문화접촉의 결과로 나타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는 동남아의 토착적인 문화요소들이 아직 강하게 남아 있던 19세기 이전 동남아의 전통적인 식품들에 대해 살펴보려고 한다. 이로써 태국 음식문화와 관련하여 더욱 구체적인 동남아 음식문화적 배경을 포착할 수 있을 것이다.

전통 동남아 사회에서 주민들의 가장 중요한 칼로리 공급원은 쌀과 생선이었다. 쌀은 위에서 언급한 稻作農耕的동남아 사회에서 필연적으로 주식을 이루어 왔으며, 생선은 동남아의 거의 모든 촌락과 도시들이 하천이나 그 지류들의 주위 혹은 해안에 형성되어 있다는 점에서 이해된다.

경제인류학적 시각에서 볼 때, 동남아에서 농민과 어민은 엄격히 구분될 수 없는 경우가 흔하다. 예컨대 근해어업을 하는 어민들 경우 해안지대에서의 농경은 보충적인 경제활동이 된다 (Clammer, 1993: 163).

특히 호숫가나 하천 주위에 사는 농민들은 농사 틈틈이 고기잡이에 나서는데, 대표적인 예로 “물고기적”(ichthyic) 캄보디아 농민을 들 수 있다.

똔레삽(Tonle Sap)과 이 호수의 주위에 거미줄처럼 발달해 있는 수많은 하천과 그 지류들은 세계에서 민물고기가 가장 풍부한 지역 중의 하나로, 우기가 시작되는 6월이면 이 일대가 범람함과 동시에 엄청난 양의 물고기떼가 전통적인 산란습관을 따라 바다로부터 강을 거슬러 올라가 똔레삽 주위로 모여든다.

이 때가 되면 이 지역의 농민들은 고기잡이 도구들을 챙겨 물에 잠겨 있는 논에서 숱한 물고기들을 포획한다 (Weggel, 1997: 25-27). 이처럼 생선이 풍부했지만, 전통 동남아 사회의 물고기 소비는 주로 말리거나 절인 생선의 형태로 이루어졌다.

그것은 저장과 유통의 문제 때문이었다고 보여진다. 건어와 절인 생선은 19세기초 인도네시아에서 중요한 유통식품이었다. 오늘날도 농촌의 식사에서 밥과 함께 빼놓을 수 없는 생선젓은 17세기 인도차이나 지역에서 확인된다 (Reid, 1988: 29).

베트남어로 느억맘(nuoc mam), 캄보디아어로 쁘라혹(prahoc)이라고 부르는 생선젓은 실은 뻑뻑 한장(paste)의 형태를 띠는 것으로 밥에 비벼 먹는다.

동남아 토착사회의 식단에서 ‘생선젓갈’과 더불어 오늘날도 여전히 중요한 것은 생선간장으로 타이어로 남쁠라(nampla), 캄보디 아어로 뜩뜨레이(teuk trey)라고 부른다 (Weggel, 1997: 36-37).

생선간장과 생선젓은 음식이 부패하기 쉽고 많은 열량을 가진 음식을 섭취하는 것이 적합치 않은 고온다습한 자연환 경에서 사람들에게 필요한 염분과 단백질을 제공해 주는 식품으로 발달했다고 볼 수 있다 (조흥국, 1997: 309).

동남아 음식문화의 특징 가운데 흔히 풍부한 향신료 사용을 든다. 향신료는 오랜 동안 동남아의 가장 중요한 특산물로서, 16세기 이후 유럽인들이 동남아에 진출한 주목적도 향신료 무역에 직접 참가하기 위한 것이었다.

동남아 시장에서 유럽인들은 인도네시아 동부의 말루꾸(Maluku) 즉 향료제도에서 정향, 육두구 등 잘 알려진 향신료뿐만 아니라, 생강, 타마린드 (tamarind), 심황(turmeric), 쿠베브(cubeb), 창포(calamus) 등 각종 약재와 향료들, 그리고 동남아 도처에서 풍부히 자라는 후추를 만났다.

오늘날 태국을 위시하여 동남아 음식의 양념에서 빼놓을 수 없는 칠레고추(chilli)는 16세기 후반 스페인 사람들을 통해 남미로부터 들어온 후 급속히 퍼져 이미 1590년대 자바섬에서 재배되고 있었다. 칠레고추가 도입되기 전 까지 동남아에서 음식을 맵게 하는 재료는 주로 심황이었다 (Reid, 1988: 30).

그밖에도 동남아 음식은 나륵풀(basil), 고수풀(coriander), 야생라임(kaffir lime), 레몬풀(lemon grass), 박하풀(mint) 등 각종 식용풀잎을 사용해 왔다 (Vatcharin, 1997: 15-17).

19세기 이전 동남아를 여행한 유럽인들은 동남아 토착인들의 식단에 채소가 적은 대신 과일이 풍부하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과일의 풍부와 다양성은 오늘날에도 동남아 도처에서 쉽게 확인되지만, 채소의 소비가 적었다는 것은 얼른 상상이 되지 않을 것이다.

이 점은 추측컨대 19세기 후반 이전만 하더라도 중국인들의 이주가 대량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에 기인할 것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도시 근교에 정착한 중국인들 중에는 시장채소 재배에 종사한 자들도 많았다 (Campbell, 1902: 272; Purcell, 1965: 180ff.).

과일들 중에서 바나나와 코코넛은 중요한 끼닛거리가 되었다. 그에 비해 두리안(durian), 망고(mango), 망고스틴(mangosteen), 람부탄(rambutan), 잭과일(jackfruit), 그리고 16세기 후반 미대륙에서 도입된 후 동남아에 급속히 퍼진 파파야와 파인애플은 계절의 별미였다.

그러나 망고는 종종 절여 밥반찬으로 먹기도 했다. 그밖에도 동남아 밀림은 다양한 감굴류 과일들을 제공했는데, 특히 라임(lime)과 포멜로(pomelo)는 토착주민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비타민 공급원이었다.

동남아 음식의 중요한 특징의 하나인 단 맛은 이 지역에 많이 자라는 사탕수수 등 당원이 풍부하다는 사실과 결코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추측컨대 동남아가 원산지인 사탕수수는 물 을 끼고 있는 지역의 대부분에서 오래 전부터 야생으로 자라거나 재배되었다.

중국인들의 제당기술이 도입된 후 17세기부터 중국과 일본으로 수출되기 시작한 사탕수수 설탕(cane sugar)은 동남아의 음식맛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과자와 디저트를 달게 하는 데 더욱 많이 사용한 것은 누런 설탕(brown sugar)으로, 이것은 역시 동남아가 고향인 종려당(palm sugar)의 액즙을 끓여 만들었다 (Reid, 1988: 30-31). 동남아의 전통적인 음식문화에서 이처럼 쌀, 과일, 생선이 풍부했던 것에 비해, 육류 소비는 적었다.

그것은 위에서 언급한 기후상의 이유나 환경의 제약 혹은 다른 어떤 종교적인 배경에서였다고 보여진다. 마빈 해리슨은 태국과 미얀마 등 동남아의 불교사회에서 살생금지의 윤리적 규범이 육식을 억제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Harris, 1985: 27).

그러나 윤회설과 공덕사상에 대한 믿음은 인구의 90%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불교신자들의 육식에 대한 인식에 분명히 영향을 미쳤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예컨대 1680년대 수년간 태국에서 파리해외 선교회(Société des Misions Étrangères)의 선교사로 활동한 니꼴라 제르베즈 신부에 의하면, 타이인들은 소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네발 달린 짐승들의 살생을 꺼려했다 (Gervaise, 1688: 87-88).

이슬람의 돼지고기 타부는 더욱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예컨대 보르네오 섬에서 무슬림으로 개종한 응아주 다약(Ngaju Dayak)족은 정령신앙을 여전히 갖고 있는 그들의 이웃 부족들보다 전반적으로 고기를 적게 소비한 것으로 나타났다.

자연환경상의 요인과 관련하여서는 특히 동남아의 밀림과 유럽과 미대륙, 서 및 중앙아시아의 초원지대를 비교할 수 있다. 즉 후자의 환경에서는 목축과 육식문화가 발달했으나, 밀림이 우거진 전자에서는 목축 전통이 발전될 여지가 없었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통 동남아의 주민들은 비록 오늘날 동남아의 도시와 촌락의 중류층 사회에서 흔히 목격할 수 있는 상당한 육류 소비와는 비교할 수 없지만 고기를 결코 싫어하지 않았다.

육류 고기가 다량으로 섭취되는 경우는 대부분 통과의례, 마을 차원의 지역신 및 조상신 제사, 중요한 이슬람 절기 등 중요한 의식에서였다.

가장 보편적인 고기는 닭, 돼지, 물소였다. 이 중 동남아의 농사에서 불가결한 존재인 물소는 사람들이 함부로 잡지는 않았다. 동남아에서 늦어도 기원전 3,000년경에는 이미 사육되었던 돼지는 이슬람이 침투한 지역 외에는 밀림의 부족사회뿐만 아니라 촌락의 농경사회에서도 초기부터 중요한 육류공급원이 되었다.

한편 개도 일부 지역에서 사람들이 먹었다. 그러나 이슬람과 불교의 영향, 그리고 현대에 들어와 서양의 개고기에 대한 인식의 영향으로 개고기를 먹는 것은 오늘날 산악지대의 고산족들과 밀림의 일부 부족사회에서만 볼 수 있다 (Reid, 1988: 3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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