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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hapter 14. 일본 음식문화에 관한 선행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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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2mark 일본 음식문화의 역사

수렵과 어업 민족이었던 일본인의 식생활은 530년경 중국에서 백제를 거쳐 일본으로 전래된 불교와 함께 변화하기 시작했다. 이 시대의 특징을 보면, 남북문화가 혼재하고 있었음은 식생활 면에서 확인된다.

예를 들면 오징어나 낙지를 먹는 풍습은 분명히 동남아시아 해양성 문화요소로써 근해에서 활, 작살, 그물 등으로 물고기를 잡아먹었다. 한편 산지에서는 단궁(短弓)과 같은 북방의 활을 사용하여 멧돼지와 사슴을 사냥했다.

당시의 식품으로는 현재 알려진 것만도 포유류 60여종, 조류 10여종, 어류 40여종, 조개류 300여종에 이른다.3) 그밖에 두족류, 멍게류와 식물의 뿌리, 잎, 과일 등 인간이 먹을 수 있는 모든 것이 포함된다.

조리법은 생식도 있지만 여러 가지 토기가 발견으로 보아 원칙적으로 불에 익혀먹었던 것 같다. 불에 굽고 찌는 등의 방법으로 화식을 했던 흔적으로 음식을 끓이는데 사용한 달군 돌도 발견되고 있다.4) 이로 보아 이때 는 자연물 채집경제를 원칙으로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음식의 독에 관한 지식도 상당히 발달되어 복어도 독을 제거하고 먹었다. 나라(奈良) 및 헤이안(平安) 시대(8∼12세기)는 쌀을 주로 하는 곡물이 주식이 되면서 동물성식품은 종적 지위로 바뀌었다.

이와 더불어 염분의 내장을 통한 유기염 대신에 해조를 구워 만든 식염을 통하여 섭취했다. 동물을 잡아먹는 데는 특별한 금기는 없었으나 사냥과 어업이 각기 독립되어 사회적 분업을 이루면서 종속 산업화해 갔다.

당시의 주식은 현미를 쪄서 먹는 것으로 아침, 저녁 두끼를 원칙으로 했다. 부식은 채소, 어패류, 조수 등이었고 대개는 열 가공을 해서 먹었다. 조개류나 채소는 향신료나 소금으로 맛을 내어 生食을 했고, 곡물, 어수육(魚獸肉), 야초(野草) 등의 발효염장식품이 생겨났으며, 각종 조미료와 향신료도 사용되었다.

또한 쌀로 술을 만들어 먹었는데 초기엔 단단하게 반죽된 것이어서 젓가락으로 먹다가 점차 양조법의 발달로 液體化되었다.5) 쌀의 조리법 중에는 제사나 외출할 때에 휴대 할 수 있도록 만든 것도 있었고 과일을 말린 과자나 쌀가루를 쪄서 만든 과자도 있었다.

이후 700년경에 이르러 궁중의식과 신에 대한 의식 등의 필요성에 의해서 일본요리의 규범이 제정되었다.

다이호우 리쯔료우(大寶律令)가 제정된 이래 율령은 927년 요우로우 리쯔료우(養老律令)에 의해 補正되어6) 여러 가지 의식을 행하는 방법과 요리를 만드는 방법과 신에게 공물을 바치는 방법 등이 세밀하게 규정된 연회석이라는 것으로 완성되었다.

645년 당나라를 모델로 한 율령국가 체제가 성립되는 시기를 전후하여 귀족계급의 생활양식이 唐風으로 변모하면서 음식문화에도 영향을 미쳤다. 금속식기, 도기, 칠기가 늘고 건조식품을 재가공하여 먹었으며 기름을 사용한 조리가 등장했다.

나라시대(710∼784)에는 식물성 기름의 수요가 급격히 늘고, 버터, 설탕, 연유가 전해져 약용으로 잠시 생산된 적도 있었다. 매년 전국으로부터 소(蘇:우유를 끓여서 만든 것)가 조정에 공납하기도 하였는데 소(蘇)를 소(酥)로 표기하기도 하였다.

『본초강목』에서는 소(酥)를 소주라고 한 기록이 있고 불전이나 醫書에서는 소(蘇)를 만든다고 하였으므로 오늘날의 버터나 치즈 비슷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한편 우유 짜는 집에서는 매일 신선한 우유가 올려졌다. 그래서 정월의 큰잔치를 비롯해서 귀족, 승려들은 소를 먹는 기회가 많아져서 우수한 영양분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에 나라시대에는 사람들의 활기찬 모습과 현란한 불교 미술 등이 발달되기도 했다.

일본에 우유나 乳製品의 제조법이 들어오는 것은 고토쿠(孝德)천왕(64 4∼654)무렵이다.『新選姓氏錄』에 보면 중국에서 귀화한 선나(善那)라는 사람이 우유를 짜서 드렸기 때문에 화약사주(和藥使主)라는性을 하사 받았다는 기록이 나온다.7)

그리고 이때부터 일본에서는 오늘날 사용된 젓가락이 일반화되기 시작했다. 한편 귀족사회에 불교가 보급되면서 식품에 대한 금기가 뚜렷해졌다. 또한 장원을8) 배경으로 귀족계급이 확립되면서 식사횟수, 조리, 식품 식사법 등이 형식화되고 때로는 의식화되어 후지와라 시대(10∼12세기)에는 궁정식을 대표로 하는 귀족음식이 생겨났다.9)

이 무렵(平安時代)은 귀족 지배의 시기로 신분에 따라서 그릇이 달라지는 도구의 계급제도가 생겨나 귀족은 청동기, 은기, 옻기 등을 사용하였다. 조리 기술의 진보와 더불어 그 것을 담을 수 있는 그릇에서도 현저한 변화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밥과 부식을 담는 그릇을 시작으로 술잔, 받침대 등에도 고도의 예술성이 가미된 작품이 등장하였다. 당시의 光孝天皇(광효천황: 9세기 중엽)은 요리를 좋아하여 요리연구에 열성적이었다. 고고덴노우(光孝天皇)는 요리연구를 정리하여 많은 요리를 후세에 전하여 사조류의 開祖로서 요리의 신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그러나 귀족들의 틀에 박힌 부자연스러운 식사법 때문에 칼로리 부족으로 인한 식생활을 초래함으로써 귀족 중에는 사망연령이 극히 낮아졌다. 그러나 일반 시민들은 戒律과는 관계없이 자연스러운 식품을 선택했기 때문에 건강한 생활을 했다.

하지만 불교의 영향으로 동물성 식품의 추방으로 교토에는 신선한 해산물을 구하기 어려워 말린 어패류 등이 상용되고 보존 식품이 더욱 일반화되었다.

이와 같이 요리의 연구는 비약적인 발전을 보여 왔지만, 귀족사회의 식사가 아침, 저녁 두 끼로 형식화됐고, 이와 함께 살생금지령 등 포유동물의 식육금지로 인하여 영양의 균형이 맞지 않아 영양실조와 같은 상태가 생겨나게 되었다.

헤이안(平安)시대가 끝나고 시민의 대표인 무사계급이 지배하던 시기로 고대 이래의 주곡 부육의 시대가 재연되어 무사들은 사냥을 즐겼다. 그리고 무사들은 귀족생활에 동경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당나라를 모방한 음식문화를 동화시키면서 주곡 부육 시대의 것과 혼합시키면서 후대의 근세음식문화를 마련했다.

여기서 선종의 영향으로 선당 식사가 가미되어 쌀을 쪄서 먹지 않고 죽의 형태로 거쳐 지금과 같은 밥으로 발전 하게 되었다.10) 이 시대 후반인 무로마치 시대에(1392∼1573는 茶가 유행하여 차를 중심으로 하는 茶문화가 발달하여 차가 상하간의 필수품이 되었다.11)

茶는 상류사회의 생활의 일부분이었다. 그러나 나라 때 승려인 村田珠光이 귀족풍이었던 茶文化를 서민 풍으로 개혁하였고 千利休가 村田珠光이래로 차도를 대성시켰다.

이것은 해외에서 전래된 취미중의 하나로 승려의 행사에서 무사의 손으로 옮겨진 것으로 천리휴(千利休)의 차도는 차실, 茶器, 요리및 茶人의 복장이 복잡한 형식이 아니고 새롭고 간편한 양식으로 대중화되어 더욱 일본 화되었다.12)

그리고 식사 회수는 세끼가 일반화되었고, 술과 과자의 증대와 함께 담배가 유행했으나 정부에서 금지법이 내려졌다.13)

또한 대륙에서 만든 만두와 두부도 수입되었고 조미료로서 된장과 간장이 나오고 가마쿠라 무사의 등장으로 건강식품이 회복되어 수명도 늘어났으며 중앙 집권 국가를 건설하기 위하여 대화개신(大化改新)이 일어났다.

(安土) 및 에도(江戶) 시대(17∼18세기) 전반에는 일식의 완성시기로 시민의 대표로 지배계급이 된 무사계급은 후반에는 스스로 귀족화 되어 활력을 상실하는 한편 화폐경제에 의하여 이미 지배계급에서 전락되기 시작했다.14)

한편 이와는 반대로 도시 상인들은 생활이 급격히 향상되기 시작하여 종래의 음식문화를 집대성하고 새로이 중국과 서구의 것을 받아들여 일식을 完成 시켰다.

양념발달과 南蠻料理의15) 수입으로 각종 절임의 완성 및 회석(會席) 요리16)가 발달하였고 과자나 메밀국수, 우동, 가쯔오부시의 유행17) 및 맛 자랑 많이 먹고 마시기 대회 등이 이 시대 음식문화의 특색이다.

구내교통의 발달은 각지의 산물을 맛볼 수 있는 기회를 주었고 조리법의 발달은 일반 시민들에까지 조리에 심취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불교의 영향으로 수육은 부정한 것으로 보았고 정진(精進)요리(料理)가18) 상하를 막론하고 인기를 모았다.

근대 19세기 후반에는 일식과 양식의 공존시대로 명치유신에 의한 봉건 제도가 무너지고 서구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려는 풍조 속에서 음식 문화에도 커다란 변화가 생겼다.

즉 양식, 육식, 밀크, 커피의 음용, 버터 치즈의 사용, 서양식 조리와 서양풍의 일본식 및 서양의 식사예법 등이나 시각, 습관 혹은 의례에 바탕을 둔 음식문화에 과학적 근거와 함께 합리성에 의한 비판을 가함으로써 음식문화의 합리화가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명치6년(1873)에 加藤祐一의『문명개화』에 보면

“사람들을 계몽하고 있는데 원래 수육, 어육 등 육식을 禁하는 것은 불법에서 온 것으로 日本의 神을 섬기는데 그런 것은 없다. ... 否定하다는 것은 佛敎에서 나온 말이지 일본에서 신을 섬기는 일에는 그런 일은 없다고 가르치고 있다.”

이는 일본인도 진정한 의미의 근대적인 음식문화 단계에 접어 들어간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일대변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시대에 음식에 대한 위생지식이 크게 보급되고 식사에 관련된 미신이 추방되어 국민체위가 크게 향상되었다. 특히 전후에 식생활의 중요성이 강조되면서 청소년의 체위가 현저히 향상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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