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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hapter 9. 부르고뉴 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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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2mark 부르고뉴 와인 역사

부르고뉴 와인은 아주 오래된 역사를 갖는다고 보인다. 문헌적으로 부르고뉴 지역에 언제 최초의 포도나무가 경작되었는지의 기원은 알려져 있지 않고 학자마다 다르게 본다.

Gaston Roupnel은 기원전 4세기경으로, Emile Thevenot는 기원 후 1세기 중반, Roger Dion은 3세기 초에 부르고뉴에 포도밭이 존재한 것으로 간주한다.6)

그러나 그 기원이 어떠하든 간에 부르고뉴 지역 포도 재배는 갈로-로망 시대 즉 3세기 말경부터는 아주 번창하게 이루어졌다는 점을Eumène의 변론7)을 통해서 알 수 있다. 한편, 부르고뉴 와인의 명성은 초기 교회에 의해 유지되어왔다고 볼 수 있다.

그 당시 와인은 교황이나 왕에게 제공할 수 있는 최상의 선물이었으며 수도원이 포도밭, 포도나무 재배, 와인 양조, 포도 수확까지 통제했던 것이다. 5세기 말에는 유럽 전역 즉 발트 해안, 독일, 폴란드, 스위스 등 지역에 서 온 수많은 민족들이 부르고뉴에 정착한다.8)

이들은 원주민인 갈로로 맹인들과 공존하면서 포도나무를 경작한다. 메로빙 왕조와 카로링 왕조 시대는 프랑크 족들이 부르고뉴를 점령하는데 포도재배에 관한 문서들이 발견된다.

587년에는 부르고뉴 왕 Gontran이 디종에 있는 생-베니뉴(Saint-Bénigne) 수사들에게 포도밭을 기증하며, Amalgaire 공작은 쥬브리(Gevery) 땅을 베즈(Bèze) 수도원에 기증한다.9)

이것이 오늘날 그 유명한 Clos de Bèze 포도원의 기원이며 본느(Vosne), 픽생(Fixin), 마르사네(Marsannay) 등의 포도밭도 이 때 기증받은 것이다.

메로빙 왕조시대 때 파리의 생 제르멩 데 프레(Saint- Germain-des-Prés) 수도원은 오늘날 클로 드 부죠(Clos de Vougeot) 근처의 포도밭을 소유하게 된다.10) 클뤼니(Cluny) 수도원은 909년에 창립되는데 베네딕트 교리를 유럽 전역에 전파시키면서 포도나무도 전파한다.

포도나무는 수도원에게 미사용 와인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도움을 주어 교회를 번창하게 한 수단이었다.11) 클뤼니 수도원이 세력을 잃게 되자 1098년 시또(Cîteaux) 수도원이 그 역할을 대신한다.

1115년 클로 드 부죠 포도원이 태어나고 그 후 600 여 년 동안 시또 수도원에 소속되었다. 시또 수사들은 샤블리 지방뿐만 아니라 코트 드 뉘, 코트 드 본느 지방의 가치를 소중히 여겼다. 다시 말해 시또 수사들은 그곳에 아주 훌륭한 포도밭을 가꾼 것이다.

클로 드 부죠 포 도원 외에 오늘날 아주 유명한 와인을 생산하는 포도원인 리쉬부르 (Richebourg), 에쉐조(Echézeaux) 등도 이 때 생겨난 것이다.

1131년에는 생-비방(Saint-Vivant)수사들이 본느(Beaune)와 플라제(Flagey)에 포도 나무를 심는데 이 포도밭 클로가 라 로마네 생-비방(La Romanée Saint-Vivant), 라 로마네 꽁티(La Romanée-Conti)가 되며 이 시기에 많은 클로들이 탄생한다.12)

이처럼 부르고뉴 와인은 클뤼니 수도원과 시또 수도원을 통해 유럽 전역에 전파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부르고뉴 와인이 maison-mère로 불리게 된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부르고뉴 포도품종 또한 프랑스를 넘어 전 유럽으로 퍼져 나간다.

다시 말해 중세 때 부르고뉴 와인은 모든 기독교 인들의 미사주 이었으며 따라서 교회에 의해 유지되고 후대에 계속 전해 내려 왔던 것이다.13) 14-15세기에는 강력한 부르고뉴 공국이 들어선다.

1342년부터 1477년 까지 부르고뉴를 4명의 공작들이 통치하는데 이 시기를 Toison d'or 시대라고 한다. 다시 말해 부르고뉴 예술이 유럽 전역에 꽃을 피우는 시기 이다.

1395년에는 Philippe le Hardi가 와인 품질 개선을 위해 부르고뉴 지방에 가메(gamay) 품종 포도나무 경작을 금지시킨다.14) 1416년에는 Charles VI가 부르고뉴 와인 생산량 제한에 관한 법령을 공포한다.

15세기에 부르고뉴 와인 산업은 크게 한 단계 더 도약하게 되는데 플랑 드르, 영국 등 유럽 전역에 수출되었으며 고급와인으로 인정되었다. 한편, 1477년 부르고뉴 통치자인 Charles le Téméraire 공의 죽음으로 부르고뉴는 루이 9세때 프랑스로 귀속되었다.

16-17세기는 프랑스가 끊임없이 외국과의 전쟁을 하는 시기이다. 따라서 와인산업은 쇠퇴해 갈 수 밖에 없었으며 더욱이 부르고뉴 와인은 샹파 뉴(Champagne) 와인과 경쟁 관계에 놓여 어려움을 겪는다.

그러나 루이 14세 주치의인 파공(Fagon) 덕택에 부르고뉴 와인은 샹파뉴 와인을 제치고 왕의 치료의 술로 그 명성을 떨치게 된다.15) 17세기에는 디종의 부르조아들이 수도원 소속 유명 포도밭을 구입한다.16)

생-비방 수도원이 1631 년 라 로마네(La Romanée) 포도원을 파는 것을 시작으로 Langres 대성 당 소속 클로 드 베즈 포도원은 1651년에, Charlemagne 대제 포도원으로 이름을 떨친 코르통(Corton) 포도원은 1660년에 팔리었다.17)

18세기는 계몽주의 시대이다. 부르고뉴 지방 본느에서 태어난 Claude Arnoux 사제가 1728년 런던에서 부르고뉴 와인에 관한 최초의 서적을 출판한다.18)

이 책은 독일어와 영어로도 출판되었는데 주목할 만한 점은 부르고뉴 와인이 왜 고급와인인가를 설명하고자 부르고뉴 지방 테르와르, 크뤼, 바람, 일조량 등을 기술했다는 점이다. 1789년 프랑스 혁명은 포도원 소유자를 일시에 바꾸어 버렸다.

성직자와 귀족들이 소유하고 있었던 포도밭은 국가에 의해 압류 당하고 경매 되었다.19) 주로 파리에서 온 신흥 부르주아들과 부유한 네고시앙들이 포도 밭을 구입하였으며 부르고뉴 와인은 그들 손에 의해 발전되어 갔다.

그러나 부르고뉴 와인은 18세기까지는 보르도 와인의 명성을 따르지 못했다는 점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Michel Vidal(2001)은 다음 두 가지를 그 이유로 내세운다.

첫째, 부르고뉴 와인의 주 고객인 디종이나 리옹의 소비자들이 장기 숙성이 필요 없는 와인(vins de primeur)을 선호했으며, 둘째 부르고뉴 언덕에서 재배된 와인에 대한 파리 사람들의 관심부족 때문이라는 것이다20).

이러한 이유들 외에 부르고뉴 지역의 지정학적 위치, 즉 교통의 불편함 때문에 수송비의 증가로 부르고뉴 와인은 가격 경쟁력에서도 보르도 와인들보다 뒤쳐졌다고 판단할 수 있다.

그러나 18세기 중반 교통 조건이 개선됨과 동시에 본느 지방의 네고시앙들의 노력으로 부르고뉴 와인은 점차로 명성을 되찾는다.

1720년 Champy, 1725년 Lavirotte, 1731 년 Bouchard, 1734년 Labaume, 1747년 Poulet와 같은 와인 商社(maison)들이 본느에 설립되었으며 나중에 최고급 와인을 생산하는 포도 원들의 소유주가 된 Lamarosse, Maire, Forgeot, Patriarche 등과 같은 商社도 당시에 설립된다.21)

이때가 포도원 소유주이면서 네고시앙들인 그 들이 고객의 입맛에 맞게 점차로 부르고뉴 와인을 질적으로 변화시켜가기 시작한 시기로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18세기 중반부터 그들은 숙성하지 않고 빨리 소비되어야하는 진홍빛 레드와인 외에 더 색깔이 다양하고 장기 숙성이 가능한 와인을 상업화 시킨 것이다.

즉 색깔의 다양성과 장기 보관이 가능한 이러한 레드와인과 설탕의 모든 잔류를 제거한 방식의 화이트 와인 생산으로 부르고뉴 언덕 포도원들의 개성화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여기서 지역명칭, 구별로 와인들의 위계가 나타난다고 볼 수 있으며 코트 드 본느(Côte de Beaune) 지방보다도 코트 드 뉘(Côte de Nuits) 지방이 질적으로 더 좋은 와인을 생산하는 지방으로 알려진다.

19세기 초 즉 나폴레옹1세 시대 때에는 부르고뉴 포도밭 분할에 관한 규정이 제정되었다. 모든 상속자는 동등하게 상속받는다는 규정에 의해 하나의 포도밭이 많은 상속자들로 인하여 작게 분할되었으며 그 결과 부르고뉴 포도밭은 수많은 작은 땅 소유자들로 나뉘게 된다.22)

이 점이 오늘날 부르고뉴 와인의 이해를 어렵게 만드는 요인 중의 하나로 여겨진다. 19세기 중·후반에는 포도묘목에 기생하는 해충인 오이디움(oïdium)과 미국에서 건너온 필록세라(phylloxéra )진딧물23)로 인하여 부르고뉴 포도 밭은 크게 황폐화 된다.

19세기는 부르고뉴 와인의 질적인 비교 평가가 나타나기 시작한 해로 볼 수 있다. 즉 고객들에게 부르고뉴 와인을 더욱 더 자세히 알릴 목적으로 1861년 최초로 본느 지방 농업위원회의 주관아래 부르고뉴 지역 최고급 와인을 생산하는 포도원의 질적 분류가 이루어 진 것이다24).

20세기 초는 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와인산업이 극심한 불황을 겪게 되면서 시장에 가짜 와인이 판치게 된다. 따라서 양질의 와인을 생산하는 생산자들이 가짜 와인에 대항하기 위해 조직 결성의 필요를 느낀다.

1923 년 Balitran 사제가 최초로 Chablisienne라는 협동조합 지하저장고(cave coopérative)를 만든다.25) 1930년부터는 코트 도르 지방 생산자-소유자들 이 와인을 무게(vrac)로 팔지 않고 병에 병입하여 코르크에 압형을 찍어 판매한다.

이때부터 부르고뉴 와인에 대한 신뢰가 다시 회복된다고 볼 수 있다. 1934년에는 부르고뉴의 고급와인을 광고할 목적으로 부르고뉴의 포도 재배자인 Georges Faiveley와 Camille Rodier가 오늘날 그 유명한 Confrérie des Chevaliers du Tastevin을 설립한다.26)

1935년 Joseph Capus에 의해 원산지 통제명칭(Appellation d'Origine Contrôlée) 규정27)이 제정되었으며 Morey Saint-Denis 포도원이 최초의 원산지 통제 명칭을 부여 받았다.

1938년 Confrérie des Chevaliers du Tastevin 의 주관으로 ‘Saint vincent tournante’ 축제28)가 다시 태어났다. 20세기 중반 수많은 포도재배-양조 조합들이 생겨났으며 1970년 말에 는 3400 헥타르가 원산지 통제명칭 지역이 되었다.29)

2009년에는 부르고뉴 포도밭 클리마를 유네스코에 ‘인류 세계 유산 (patrimoine mondiale de l'humanité)’ 등록 신청을 하였으며 현재 ‘인류 세계유산’ 후보로 선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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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출처 •krei 한국농촌경제연구원 •thinkusadairy.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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