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램프쿡 로고
    • 검색검색창 도움말
  •   
  • 사찰음식 이야기

  • SNS 공유 페이스북 트위터 네이버 카카오스토리 카카오톡
  • 이전페이지
  • 목차
  • 다음페이지
  • Chapter 1. 한국 사원의 역사와 음식문화
  • 이동

h2mark 사원의 음식문화 성립 배경과 시설

사원에는 상주 승려가 있고 이중에는 安居를 통한 집중 수행하는 승려와 사원 관련 여 러 일을 처리하는 승려도 있다. 때로는 결사운동으로 聖俗이 모여 교학과 신앙 활동을 한다. 또한 각종의례에 따른 예불 공양과 승려 공양을 위한 음식 공양은 매일 있을 수밖에 없다.

불사시에 찾는 신도들이 모여들고, 행인들을 위한 음식제공도 한다. 이처럼 사찰에는 음식을 매일 상주승과 사찰을 찾는 신도에게 공양하지 않을 수 없다. 이에 따라 음식관련 사원경제 기반과 공양시설이 갖추어져 있다. 여기서는 역사적 사례를 중심으로 음식문화가 성립될 수 있는 배경을 고찰한다.

인도 초기 불교교단에서는 탁발에 의한 생활과 수행을 하였다. 중국으로 불교가 전래되고 唐이 일어나면서 등장한 道信과 私仁은 호북성 기주를 중심으로 활동하여 사제 간 계승과 사상의 연속성으로 보아, ‘東山法門’이라 부를 수 있으며 후대 선종의 모태가 될 수 있다고 한다.

동산법문의 사람들은 정주 생활을 했고, 한꺼번에 많은 수의 제자양성이 가능했으며 탁발에 의한 생활보다 농사일을 하는 생활을 하게 되어, 선 체험과 일상생활이 합일되는 사상의 형성을 촉진하였다. 동산법문의 조직적, 집단적 수행법이 존재하고 이를 통해 얻은 깨달음을 총칭하여 ‘守心’이라 불렀다.

당시에 이미 수행의 경지를 스승이 인정하는 入室, 付法, 印可 등이 존재했다. 신라 말 선승들의 법맥이 주로 연결된 洪州宗의 百丈懷海720-814는 독창적인 禪院淸規를 제정하였다. 普請을 행하여 ‘上下均方’할 것을 강조한 것은 선종 사원이 풍부한 자체 노동력을 확보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다고 볼 수 있다.

백장 스스로 이를 실행하여 ‘―日不作이면 一日不食’했다. 이러한 백장의 청규는 신라 선종 승려들에 의해 자연히 신라 선종 사원에 도입되어 대집단화하는 데 영향을 끼쳤다고 하겠다.

성주사의 무염이 항상 대중과 같은 음식을 들고 같은 옷을 입었으며, 뭇 영즙과 심지어 물 긷고 나무 지는 일에까지 중인에 앞섰다는 것은 이러한 영향을 받아 선종 사원에서 실행 된 사실을 보여준다.

성주사의 전각 규모를 보면 불전이 도합 73간, 승려의 거주지인 내승당, 주실이 합쳐 16간, 동.서 .중.외행랑이 합쳐 830간 그 외 水閣 7간, 庫舍 50간 등이 주요 건물이다. 태안사 선종 사원의 건물 규모는 모두 126간의 건물이다.

이중 승당 4간, 유나방 9간, 사문 1간, 상원주청 3간, 장주방경 2간, 입실방경 4간, 별감방경 3간 등 모두 26간이 승려들의 거주 시설로 생각된다. 872년의 비문 말미에 적힌 福田數 40인을 수용할수 있는 공간이 된다.

그 외 생활 시설인 食堂 3간, 大庫便 5간, 淨廣 5간, 水家 3간, ()架 4간, 馬() 5간, 목욕방 3간, 圓間 3간 등 31간은 일상생활의 편의시설로 추측된다. 선종 사원의 중요 요소인 비전 1간과 조사당 3간도 확인된다.

봉암사에는 불전이 9개소, 승려 거주 공간이 17개소, 누관낭무가 15처인데 큰 곳은 20, 30간이고 작은 것은 7-8-9간이다. 특히 요사가 17개소로 많은데 이는 거주하는 인원이 많았음을 보여준다. 이상의 사원생활 시 설에서 부엌을 표현하는 내용은 후대의 각종 자료에서도 언급된다.

討. 淨獻, ()善堂, 斷房, 食堂 등으로 표현된다. 1102년 內帝釋院의 廟都監의 判官으로 右街僧錄同正行副僧正 景廉이 배속되 었다. 국가의 왕궁 내 중심사원에는 사원의 내부관리를 맡은 都監이 설치되어 있었고 여기에 僧錄司 人員이 파견되어 관리하였다.

獻都監은 주방일과 관련 된 것이다. 사원 내의 관리를 위한 여러 직무를 생각할 때 여러 都監이 존재 했을 것으로 추측되며 여기에 각기 判官을 위시한 조직원이 있었다. 조리하는 공간 외에 경제활동을 통해 축적한 곡물이나 시납물 등을 다량 보관하고 있었다.

창고는 庫. 庫 (), 倉庫, 庫舍 등으로 지칭되었다. 회암사에는 특별히 醬庫가 있어 주목된다. 수선사에는 園頭硬, 穀食() 등이 보인다. 대가는 방앗간이다. 사원 자체 조직은「봉암사지증대사비」의 음기에 ‘院主 大德 能善 通俊 玄逸 長解 鳴善’이라 기재한 사례가 있다.

院主는 사원 내부 조직의 책임자로 생각된다. 都()邦는 사원 내의 승려들의 일상생활에 필요한 잡다한 일을 처리해주며, 한편으로 대중의 규율을 단속하고 통솔하는 임무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조직의 사례는 나말여초 금석문 자료에 일부 보이다가 고려 전기에는 일상화되면서 구체적 기록을 남기지는 않는다.

하지만 문집 등의 자료에는 三鋼 조직이 각 사찰의 자체 운영을 담당하였음은 분명해 보인다. 이는 조선시기에도 지속되고 오늘날의 종무소로 이어진다. 사원에는 승려들의 생활공간뿐만 아니라 일반 신도들도 함께 하기도 하였다. 고려 중기부터 지방사원에서 일어난 結社運動이 그러하였다. 몇 사례를 제시한다.

義天의 婚()로 알려진 화엄종의 戒()은 태백산에 돌아가 覺華寺를 창건하고 법시를 여니 사방의 학자가 폭주하여 날마다 천백명은 되어 法海龍門이라 하였다고 한다. 撤()宗의 경우 1123년(인종 1)과 1126년(인종 4) 사이에 津 ()意이 智異山 五臺寺를 중수하여 水精社를 건설하였다.

고승과 일반신도로서 社에 들어오고자 하는 사람이 3000명 이나 되었다. 天合宗의 지방 사원에서의 승려 모임은 功德山 東白董社의 성립에서 볼 수 있다. 1199년(신종 2) 경부터 精通師가 공덕산에서 백련사를 결사하였다.

만덕산 白()社는 7世에 의해 창사되었다. 知訓에 의해 창사된 송광산 修禪社는 무인정권의 실력자는 물론 지방 토호들도 入社하고 16國師를 배출할 정도로 유명한 결사 모임이다. 결사 모임은 사원에서 수행하는 승려만이 아닌 세속인들도 참여하여 불교교리를 토론하고 신앙 행위를 한다.

聖俗一體의 불교 대중화, 일상화가 진행된 양상으로 주목되는 운동이다. 여기에도 대규모 給食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이러한 모임은 불가능한 것이다. 이에 관한 구체적 음식 공양방법에 대해서는 기록이 남겨져 있지 않지만 그 배경은 충분히 짐작된다.

사원에는 어느 정도의 승려가 머물고. 그에 따른 寺院田은 어느 정도 배정되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각 사원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겠지만 조선 태종조에 사찰을 정리하면서 남긴 법제 자료에 있다.

“各官 邑內의 資福에는 給田이 20결, 노비가 10구, 常養이 10명이며, ()外의 各寺에는 급전이 60결, 노비가 30구, 상양이 30명입니다”라 하였다. 상양 10명 혹은 30명은 그 사원의 상주승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를 유지할 사원의 재정은 각기 20결, 60결임도 짐작된다.

노비를 제외하고 보면 승려 1명 당 2결의 토지가 배정 되어야 사원에서 생활할 수 있는 셈이다. 조선 초 사원전을 대대적으로 屬公하던 때의 기준이므로 고려시기, 신라시기로 소급될수록 더 많은 사원전이 배정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시기 중앙의 대사원은 1000결의 토지가 지급된 현화사의 예가 있고 지방 사원으로 500결의 토지가 지급된 해인사의 예가 있다. 고려후기 사원전 운영이 잘되지 않아수입이 줄어들면 승려 개인 재산, 세속 시납토지, 재물 등으로 구성된 常住寶를 조성하여 그 기금을 바탕으로 貸付利殖을 통한 사원 유지비를 조달하기도 하였다.

근대시기 사세를 정리한 자료에도 사찰에 소속된 평균 대중은 30~40명이 있었다고 한다. 사원에서의 음식공양은 연간 정기 국가불교의 례에도 시행되었다. 고려시기에는 聖上節日道場, 정월 燃燈會, 3월 經行, 3년마다 열리는 仁王會 등은 府 단위 이상의 행정구역에서 전국적으로 동시에 시행되는 불교행사였다.

주부군현에서 매년 시행된 경행에 ‘醉()樂’이 있었고 外吏가 비용을 ‘緊數’할 때 많은 폐단이 있었다는 지적은 호장층이 주도하고 지역민이 참여했음을 말해준다. 호장은 이를 통해 지역사회를 결속하는 역할을 하였다.

‘醉能’라 함은 참여자가 배불리 먹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러한 음식을 공양하는 장소는 사원이었을 것이다. 승려만을 공양하는 의례로는 飯僧이 있다.『고려사』에 가끔 나오는 10만 반승 사례나 국왕이 베푸는 반승 사례가 보인다.

세속인이 사원에 조상 추모를 위해 설치한 忌日寶를 통해 베푸는 기일재와 우란분재 등에도 풍성한 음식이 제공된다. 고려말부터 조선초에 여러 종류로나누어 시행된 국가 불교의례가 水陸齋로 단일화된 의례에는 많은 음식이 공양되었다.

특히 우란분재는『佛說孟()』에 의해 지옥에 빠진 영혼을 구제하도록 가르친 말씀에 따라 하는 의식이다. 지옥에서 고통을 받는 중생을 풀어주는 의식으로 우리 눈앞에 보이는 생명의 고통뿐만 아니라 지옥세계의 중생까지 대상을 삼아 하는 자비에 의한 구원의 적극적인 활동이 었다.

선망 부모나 현재 부모뿐만 아니라 시주들의 가정에 복을 발원하는 의식이 된다. 그 날짜는 7월 15일이었다. 고려 왕실에서 현종의 부모를 위해 현화사를 창건하여 진전을 두고 7월 15일을 기점으로 3일간 彊()會를 열어 부모를 추천하였는데 우란분재와 관련이 있다.

조선 초의 成促이『備齋業話』에서, 7월 15일은 속칭 百種이라 하여 僧家에서 백가지 꽃의 열매를 모아 孟關():을 베풀었는데 부녀자들이 암자에 모여 곡식을 바쳐 돌아가신 부모의 영혼을 불러 제사를 지냈다고 하고,『東國歲時記』에도 7월 15일은 國俗으로 中元이라 하고 亡親魂을 모시고 공양하는 의식으로 전하고 있음을 보아, 7월 15일의 의식은 孟關()다.

관인들의 시제로 되었음은 7월 15일을 전후하여 관리에게 3일 간의 휴가가 있음에서 알 수 있다. 의식의 내용으로 백가지의 맛있는 음식을 불전에 올리고 先亡 父母와 현재 부모를 위해 축원하고 이어 승려들에게 음식을 공양한다.

세속과 함께하는 결사 모임, 연등회, 경행 등의 국가불교의례, 조상 추모를 위한 우란분재, 기일재, 수륙재 등에 참여한 세속인은 물론 승려들에게 음식공양이 있었지만 사원에는 상주 승려들의 수행을 위한 음식문화가 전통적으로 계승되어 왔다.

승려는 수행을 본분으로 한다. 부지런히 노력하는 자란 의미의 沙門, 乞食하는 자라는 뜻인 比丘, 比丘厄여성 등으로 지칭 된다. 교단에서 수행을 쌓은 지도적 지위에 있는 자를 上座, 또는 長老라고 불렀다. 大德. 尊者, 具壽 등으로 옮긴다.

구족계를 받는데 비구는 250계를 비구니는 348계를 받았다. 그 내용은 五戒를 기본으로 하는데 금욕, 청정 생활을 강조한다.

불교가 전파된 지역은 생산 여건이나 기후에 따라 승려들이 먹는 음식도 달랐지만, 우리나라의 경우는 대체로 자극적 음식과 飮酒 및 肉食을 하지 않았다. 각 고승들의 일대기를 적은 고승비나, 행장 등에는 자극성 강한 음식은 물론 음주, 육식을 금한 것으로 나타난다.

고려 말 尿佛의 상소문에는 불교계의 타락을 지적하면서 사원 주변에서 파, 마늘을 재배하고 심지어 육식을 한다는 비난을 한다. 이러한 예는 사원의 수행 승려들이 깨달음을 얻기 위해 담백한 음식을 공양하였던 사찰음식문화 전통을 반영한다.

  • 이전페이지
  • 목차
  • 다음페이지
  • 자료출처 •서울특별시 친환경급식담당관 •대한불교조계종 한국불교문화사업단(선재사찰음식문화연구원)
  • 자료출처 바로가기

향토음식 한반도통합본 후원금 모금안내 향토음식 한반도통합본 후원금 모금안내 바로가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