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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hapter 1. 감귤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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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2mark 감귤의 유래

♣ 삼국시대~고려시대

탐라(제주도)와 한반도와의 관계기록은 삼한시대에 마한(기원전 3세기~기원 후 4세기)과의 왕래로서 비롯하며 마한이 망한 다음 백제에 복속하였다.

일본서기(日本書記)에 의하면 수인제(垂仁帝)의 명에 의해 서기 70년에 田道間守라는 사람이 상세국(尙世國)에서 비시향과(非時香果)를 가져왔다고 하였는데, 여기서 말하는 비시향과는 감귤의 한 종류가 분명하며 상세국은 제주도를 지칭한 것이 아닌가 하고 추측하는 사람도 있다.

일본 구마모토현의 오랜 전설에 의하면 신공황후(神功皇后)가 삼한(三韓)에서 귤을 가지고 와서 그것을 심게 하였다고 한다.

고려사 세가(高麗史 世家) 권7의 기록에 의하면 문종(文宗) 6년 (1052년) 3월에 “탐라에서 제공하는 귤자의 수량을 일백포로 개정 결정한다”라고 되어있는 것으로 보아 그 이전부터 제주도의 감귤이 세공으로 바쳐졌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세공이라 함은 임시과세인 별공에 대하여 해마다 정례적으로 공납하던 상공(常貢)을 뜻하므로 탐라의 감귤세공의 유래가 자못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 조선시대

조선시대에는 태조원년(1392년)부터 제주도 귤유(橘柚)의 공물에 대한 기록이 계속되고 있다 세종 8년(1426년)에는 호조의 게시로 전라도와 경상도의 남해안에도 유자와 감자를 각 관서에 심게 하였다.

감귤(柑橘)이란 용어는 세조원년(1456년)에 제주도안무사에 내린 유지 《세조실록(世祖實緣) 2권》에 나온다 “감귤은 종묘에 제사지내고 빈객을 접대함으로써 그 쓰임이 매우 중요하다.”로 시작되고, 제주과원의 관리실태와 공납충족을 위한 민폐, 사설과수원에 대한 권장방안, 번식생리와 재식확대, 진상방법의 개선방안 등을 기록하고 있다.

감귤은 약용으로, 생과용으로 그리고 제사용으로 매우 중요시되었기 때문에 역대왕실은 그 수요를 충당하기 위하여 과실세를 제정하는 동시에 관영 과원의 제도를 마련하였다.

지방 관영과원은 관찰사와 수령 책임하에 관노비나 군졸 등으로 하여금 관리케 하였으나 때로는 성적이 부진하여 민간의 과수원에 미치지 못하였다. 따라서 관은 진상물량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민폐를 끼치게 되었고 민간 과수원의 발달을 저해하는 주요 원인이 되었다.

6권에는 제주 3읍에 희귀한 감귤나무를 심고 장려하며, 그 관리상태에 따라 상벌을 받도록 하였다 노예계급인 노비로 있는 사람이 당감자(唐柑子)와 당유자 각 8주, 유감 20주, 동정귤 10주를 심으면 노비계급을 풀어 주었다.

일반농가는 당감자와 당유자 각 5주, 유감관 동정귤 각 15주를 심으면, 면포 30필을 상으로 주었다 그러나 감귤나무를 심은 후 관리가 소홀할 경우, 상으로 준 면포의 반환은 물론 노비로 환원하도록 하는 강경한 장려 방침이 기록되어 있다.

1704년 이형상 제주목사 당시에는 관과원이 42개소(제주 29, 정의 7, 대정 6)로 증가 되었었다. 감귤재배는 관리들의 강요에 의한 것이 대부분이었으며 공납량의 연차적인 증가로 지방관리들의 횡포까지 가중되어 민폐가 많았던 관계로 조선말기에는 차츰 재배주수가 감소되었으며 고종 31년(1893년) 진상제도가 없어진 이후는 과수원이 황폐화 되어갔다.

조선시대 제주 감귤 과수원
▲ 조선시대 감귤 과수원 지도

♣ 감귤의 근.현대 1910~1980년대

일본이 한국을 지배하는 동안, 새로운 감귤품종이 도입되면서 점차 재래종은 없어지기 시작하였다. 이에 따라 과거에 감귤재배가 많았던 곳에서는 병귤을 비롯하여 당유자, 유자, 진귤, 청귤, 동정귤 이 외에도 변이(變異)되거나, 이름을 알 수 없는 몇 품종만이 남아있다.

재래종을 제외한 제주에서의 감귤재배시기는 1902년 프랑스 출신 엄탁가(Esmile J. Taque) 신부가 제주에 오게 되어 1911년 일본에서 온주밀감 15그루를 들여와 심은 것이 현재 제주에서 널리 재배되고 있는 온주밀감의 효시이다.

서귀포시 서홍동에 있는 천주교 복지 수도원에 심었던 나무 중에 1그루가 지금까지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품종이라고 알려져 있다

일본인 미네(峰)도 1913년에 많은 온주밀감 묘목을 도입하여, 서귀포시 서홍동에 심었던 감귤나무 품종 중에서 일부가 제주농원에 남아 있다. 또한, 서귀포시 신효동에는 김병호가 목포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담배쌈지에 담아 가지고 온 하귤(夏橘)종자를 파종하여 자란 품종이 아직도 남아 있다.

감귤은 1950년대 후반부터 감귤의 재배면적이 늘어나면서 ‘대학나무’로 불릴 정도로 제주에서는 가장 소득이 높은 작물로서 빛을 보았다. 1960년대 초부터는 감귤을 재배하고자 하는 농가들도 많아졌다. 특히 1964년부터는 농어민 소득증대 특별사업으로 정부지원에 의하여 급속히 신장하기 시작하였다.

불과 10년 사이에 10,000ha 이르렀다 계속되는 재배면적 확대에 따라 1999년에는 25,823ha에 63만 톤 이상이 생산되어 우리나라의 제1의 과수로 자리 잡았다. 재래품종으로는 병귤, 당유자, 청귤, 동정귤, 홍귤, 진귤, 광귤 또는 지각(只穀) 등 몇 품종이 내려오고 있다.

제주지역에서 재배되고 있는 감귤품종은 거의 대부분 온주밀감이고 재래종 감귤은 거의 도태되었고, 현재 상업적으로 재배하고 있는 품종은 대부분 일본에서 수입되어 일부 품종만이 현지 선발을 거쳐 재배되고 있다.

1954년부터 재일 교포 등에 의해 도입되기 시작한 묘목은 1970년까지 349만 주가 넘었다. 1960년대 일본에서 도입된 품종으로는 당시 장려품종으로 지정되었던 궁천조생(宮川早生)과 임온주(林溫州)가 주로 도입되어 심어졌다. 1970년대에 들어서서 우량 품종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다양한 감귤품종이 도입되어 심어졌다.

수확시기에 집중 출하를 막기 위하여 극조생 온주밀감과 만감류를 재배할 필요성이 있어 극조생 온주밀감으로서 농존진홍청 제주 농업시험장에서 육성한 신익조생(濟州 6號)과 삼매조생, 조생종 온주밀감으로는 흥진조생(興津早生)과 삼보조생, 중생종으로는 남감20호, 미택조생, 번전온주, 구능온주, 향산온주, 그리고 만생종 온주밀감으로는 청도온주와 뇌호온주 등 11개 품종으로 장려품종을 지정하였다.

1980년대에는 재배하는 품종에 대한 정리가 이루어졌다. 즉, 궁천조생과 임온주는 품질, 수량, 저장성 등의 문제로 없애기로 하고 극조생온주밀감의 비율을 높여 3월 이후에 출하가 가능한 만감류의 비율을 높이는 방향으로 추진되었다.

그러나 장려품종에서 제외되었던 궁천조생은 과일모양, 저장성 등이 좋다는 이유로 재배농가가 선호함에 따라 재배면적이 오히려 증가하였다.

1981년부터 품종갱신 사업을 적극적으로 유도하기 위한 자금이 지원되었고 이는 품질을 위주로 하는 생산체제로 전환하기 위한 계기가 되었다. 이에 따라 우량품종으로서 일남1호, 임기조생 등이 도입되어 보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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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출처 •농촌진흥청 국립원예특작과학원 배연구소 •전남대학교 •숙명여자대학교 •이화여자대학교 •송원대학교 •제주농협 •(사)제주감귤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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