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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hapter 10. 참외, 울산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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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2mark 잊을수 없는 달콤한 맛: 참외

울산은 오랫동안 먹을 것을 생산해 인근 도시로 공급하던 농촌이었다. 그러나 공업단지 선포로 급속한 변화를 맞이한다. 참외, 배, 무 등을 생산하던 농토는 사람들이 살 집이나 각종 공장으로 변해갔다.

♣ 태화강변에 지천으로 널린 참외

울산의 여름을 알리는 과일이 있었다. 바로 참외와 수박이다.112) 수박에 대한 기억과 자료는 많지 않다. 여름 과일에 대한 자료가 많지 않은 가운데 흥미 있는 자료가 있어 소개해보려고 한다.

둥굴 둥굴한 수박의 웃꼭지를 뚝 따고 강릉생청(江陵生淸)에 어름을 느어서 너를 주랴......하는 李도령의 사랑가 한 곡조는 춘향이가 안이라도 녀름 사람으로서는 누구나 듯기만 하여도 저절로 속이 시원하고 목에 침이 술술 들 것이다.

그러나 수박은 갑이 빗싸고 먹는데 따라 드러가는 것이 만흐며(꿀과 어름가튼 것이 업서도 못 먹는 것은 안이지만)시원은 하다고 할지언 정 참외처럼 배부르게 먹는 것은 안이다.

참외는 수박보다 비교 갑이 싸고 먹기에 편리하고 배가 또한 쉽게 부른다. 수박을 귀족적이오 뿔조아적이라 할 것 가트면 참외는 평민적이오 푸로레타리아적이다. 무슨 명물 무슨 명물 하야도 녀름의 명물은 참외일 것이다.113)

수박과 참외를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로 비교해 놓은 것이 인상적이다. 당시 유행했던 사상의 영향이다. 때는 1928년 여름이었다. 당시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동의했을 법한 내용이겠지만 오늘날 상황과는 다르다.

그도 그럴 것이 더 이상 참외가 가난한 사람이 먹는 과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참외의 위상과 몸값은 수박에 비할 바가 아니다. 시간이 흘러 1959년 6월 28일『동아일보』는 제철을 맞이해 출하 되는 수박과 참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쏟아져 나온「수박」,「참외」그러나 서민층엔『그림의 떡』”

그림의 떡인 수박과 참외가 울산에서는 잘 재배되었다. 울산 참외의 역사는 꽤 길다. 1530년『신증동국여지승람』에 울산의 참외에 대한 기록이 있다.

(언양읍성) 북성 밑에서 난다. 그 종자가 경적전에서 나기 때문에 적전고라고 한다. 매년 겨울에 심어 4월 그믐에 진상한다. 심고 기르기가 매우 어렵다. 성종 초년에 혁파하였다.

경적전은 임금이 신하를 거느리고 경작하던 밭을 말한다. 울산 참외는 임금의 밭에서 나는 참외와 종자가 같았다. 그러나 참외 재배가 쉽지 않았던 듯하다.

진상에 적합한 참외를 생산하는 일의 어려음이 받아 들여져서 얼마 후 진상품에서 제외되었다. 그 이후 울산 참외에 대한 기록은 오랫동안 보이지 않는다. 일제강점기가 되면서 울산 참외의 명성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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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출처 •부산광역시농업기술센터 •우리음식연구회 •제주특별자치도농업기술원 •제주한라대학교 호텔조리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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