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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hapter 3. 일본문화, 위반과 창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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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2mark 오감만족 활어회

♣ 장터에 빠질 수 없는 요깃거리, 국밥

1876년 부산항이 개항되기 이전까지 옛 부산, 동래부는 군사적 요충지였을 뿐만 아니라, 상업의 중심지 역할을 담당해왔다. 조선시대부터 동래에는 동래 장시가 있어왔고, 일제에게 침략을 당해 동래읍성의 성벽이 철거된 후에도 서민들은 그들의 장시 문화를 계속 유지해 나갔다.

1924년에 철거된 동래읍성의 객사건물에 동래 공설시장이 열리면서, 사설시장이 이 공설시장과 병존한 형태로 장사를 하게 된다. 이후 1960년대에 시가지 확대로 장을 못 열게 하자 온천동 비석거리(1969), 오곡동 오시게(1972)를 거쳐 구서동으로까지 이전하며 장을 계속 개시했다.부산발전연구원 부산학연구센터, 「부산의 장터」, 부산발전연구원, 2007

이러한 장시 문화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이 시장기를 달래주는 국밥이다. 흔히 부산에서 국밥하면 돼지국밥을 떠올리지만 당시 먹던 국밥은 소고기국밥이나 장국밥의 형태에 가까웠다. 돼지국밥이 부산에서 유행하게 된 것은 1950년대 이후 피란민들이 경남지방에서 몰려들기 시작하면서부터다.

순대국밥만으로는 순대의 수요가 모자라기에 돼지고기와 돼지사골을 우려 내 피란민들의 허기를 채우던 음식이 부산까지 흘러들어와 다양한 돼지국밥이 부산 안에 정착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부산의 돼지국밥 간판에는 창녕, 밀양, 진주, 합천 등 다양한 경남의 지역명이 국밥집 이름들로 쓰이고 있다.

소고기국밥
▲ 소고기국밥 : 부산 해운대역 맞은편 버스 31번 종점이 있는 국밥집 골목에서 파는 얼큰한 소고기국밥

♣ 시장(市場)과 함께한 서민들의 국밥 문화

지역별 소고기국밥의 형태를 보면, 가장 큰 장시가 열리고 모든 양반들이 과거시험을 치러야 하는 곳, 즉 서울(한양)을 중심으로 소고기국밥 문화가 활성화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서울 인근의 안성, 공릉, 곤지암 등에서 팔았던 소고기국밥이 가장 유명했다.

일명 장터국밥의 형태로 이러한 소고기국밥이 장국밥이라 불리기도 하는데, 이 장국밥의 의미가 장터국밥의 줄여진 뜻으로 볼 수만은 없다. 장터국밥의 성격은 우리 고유의 탕반(湯飯) 문화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아야 하며, 이 탕반(湯飯)을 우리말로 장국밥이라고 한다.

가장 간단한 방법으로 국에 밥을 말어 먹는 탕반 문화가 서민들의 장터음식과 다르지 않아 장터국밥과 장국밥의 의미가 중첩하게 된 듯 보인다.

서울에서 많이 먹던 장국밥(탕반)의 형태는 사골육수에 토장*을 넣어 간을 하고 밥을 말아먹는 형태였다. 이런 형태를 봤을 때, 된장이나 간장으로 간을해 국과 밥을 말아먹는다는 의미로 장국밥의 의미를 생각해 볼 수도 있다.

탕반 문화의 유래에 대한 설은 남은 제사 음식을 말아먹던 풍속에서 왔다는 설, 하늘에 제를 지낸 제물(소)을 끓여낸 국물을 밥과 함께 나눠 먹은 설농탕에서 시작 되었다는 설 등이 있는데 이 유래들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탕반 문화가 그만큼 오랜 시간 동안 우리 음식 문화에 깊숙이 자리 잡아 왔다는 사실이다.

크게 권역별로 나누어 보면 따뜻한 탕반 음식을 즐기는 풍속은 비교적 추운 지방에 속하는 우리나라 중부를 중심으로 한 이북 지역까지 있었고, 중부 이남 지역에는 탕반 문화보다는 온난한 기후 안에서 비빔밥 문화가 주를 이루었다. 흔히 예부터 개성에 탕반이, 진주에는 비빔밥이 유명한 것은 기후에 따른 식생의 차이라고 볼 수 있다.

♣ 국밥의 다양한 변화 속에서 탄생한 소고기국밥

김치와 비빔밥이 세계로 뻗어나가는 것처럼 우리 음식은 이제 전통성과 지역성을 초월해 나아가고 있다. 소고기국밥이 우리나라 곳곳에서 찾아 볼 수 있는 것도 탕반 문화가 양반만의 문화나 한 지역의 토속음식으로만 규정될 수 없을 만큼 사람들의 교류 속에서 탄생한 음식이기 때문일 것이다.

경상도 지역에서는 이런 탕반 문화가 색다르게 변화되어 만들어진 대구육개장이 유명했다. 대구육개장은 기존 소고기국밥의 형태에 변화를 주었는데, 개고기로 만들어진 음식이었던 개장의 양념 방식을 소고기국밥에 응용해 ‘육개장’을 만들어낸 것이다.

이 육개장은 마치 국물이 있는 비빔밥처럼 느껴질 정도로 갖은 야채와 잘 끓여진 소고기 국물과 고기, 매콤한 양념이 절묘하게 조화된 까닭에 곧바로 대구에서 가장 인기 있는 음식이 되었다.

그 후 한국전쟁으로 피란민들에 의해 지방 곳곳에 전파되게 된 육개장은 부산지역에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부산에서는 육개장 외에도 소를 식재료로 이용한 국밥들, 곰탕, 소고기국밥 등 다양한 국밥이 부산의 대중음식으로 자리 잡고 있어 각 지역의 문화가 섞여 든 부산의 역사를 이해해 볼 수 있게 한다.

오늘날과 같이 보통 진한 고기 육수에 간단히 간을 해서 먹는 곰탕과 비슷한 국물에 간단한 양념을 첨가한 장국밥의 형태가 지역에 따라 맑은 육수에 야채와 양념을 달리해서 먹는 여러 형태로 변화되어 각 지역의 향토음식으로 안착하게 된 것이다. 그 변화의 이유는 어쩌면 간단한 것 같다.

소고기는 서민들에게 비싼 보양식과 같은 것이었고, 그것을 많은 사람들이 가장 저렴하게 먹는 방식으로 탕반 문화가 곰탕에서 육개장의 형태로까지 다양하게 변화하게 된 것이다. 소는 농경사회의 중요한 가축으로 우리 민족의 상징적 동물로 일컬어져 왔다.

이 소는 우리의 들과 산을 일군 뒤에도 자신의 살과 뼈까지 아낌없이 주던 가축이다. 개나 돼지에 비해 비싸고 먹기 어려운 음식이었지만, 제사 때 먹는 소고기탕국에서부터 식당에서 가끔 사먹게 되는 곰탕, 소고기국밥, 육개장에 이르기까지 모두 우리의 향토음식으로 여전히 사랑받고 있다.

♣ 서민들의 탕반문화로 보는 홍익인간(弘益人間)의 의미

지금도 어느 지역에서나 그리고 부산에서도 소고기국밥을 판다. 선조들처럼 우리가 가꾸고 키운 소를 먹기보다 수입 소고기로 국밥을 먹게 되었지만, 가난한 서민들의 허기를 달래는 공동체의 음식으로서의 의미는 전혀 퇴색되지 않았다.

지금 우리가 먹는 소고기국밥은 탕국처럼 너무 맑기만 하지도, 육개장처럼 너무 매콤하거나 걸쭉하지도, 곰탕처럼 너무 진하지도 않게 맑은 고기국물에 무, 콩나물, 파를 넣어 약간 붉고 칼칼하게 양념해 낸 국밥만을 의미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소를 이용한 다양한 국밥 이야기 전체가 소고기국밥의 의미로도 이해될 수 있지 않을까?

다른 나라에서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탕반 문화에 대한 것을 정리해 보면서, 이 탕반 음식 하나만 보더라도 우리의 음식 문화가 얼마나 많은 변화과정을 거치고, 많은 이들이 즐길 수 있는 음식으로 성장해 왔는지 성찰하도록 도와준다.

‘홍익인간(弘益人間)’, 널리 인간을 복되게 하기 위한 마음은 소고기국밥 하나에도 깃들어 있으며, 이러한 문화를 그저 소박하고 볼품없이 폄하하거나, ‘잡종’과 ‘가난’의 상징으로만 보는 것은 지금까지 이어 온 탕반 문화를 오직 수난의 역사에 기대어 생각하는 것밖에 되지 못하는 것이다.

이 탕반 문화는 오랜 농경사회의 전통과 함께 해왔던 공동체 음식 문화의 향수가 깃들어 있기에, 잘 말아진 국밥 한 그릇을 뜨는 순간, 우리는 먼 옛날부터 지금까지 말없이 이어져 온 우리만의 교감에 동참하게 된다.

소고기 반근을 국거리로 사더라도 호주산이나 미국산을 사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상이 되고, 중국산 배추까지 사서 김치를 담가 먹어야 하는 현실이 가슴 쓰리다.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들만의 맛을 교감하게 해주는 소고기국밥과 김치를 버리지 못하는 서민들의 일상까지 애처롭게 바라보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여린 풀과 같이 바람에 뉘어지기만 했던 것으로 우리 역사를 바라보지 않는 것, 우리 민족의 삶의 한 토막을 단순히 굳어진 전통 음식의 이름과 의미로 나열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이렇게 대중 스스로가 지키고 변화시켜 온 그들의 음식 문화가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말과 다를 바 없는 맛의 언어들을 소중하게 간직하면서도 그들만의 음식을 즐기고 스스로 변화시킨 능동적인 힘. 그것은 앞서 살펴보았듯이 동래파전이 아니라 동래파전을 전하게 해 준 기생들이 만들어 낸 한 토막의 문화였으며, 우리의 탕반문화를 다채롭게 해 준 것은 가난한 서민들이 나누던 따뜻한 공동체 문화였다.

*토장

메주에 소금물을 넣어 으깬 후 숙성시켜서 장물을 분리하지 않고 먹는 장

탕반(湯飯, 장국밥)

1800년대 말 경에 나온 <규곤요람(閨壼要覽)> 처음 등장하는 탕반은 좋은 백미를 깨끗이 씻어서 밥을 짓고, 무를 넣어 잘 끓인 장국에 나물을 갖추어 만들어 국을 만다. 밥을 말아 나물을 얹고 약산적하여 위에 얹어 후춧가루, 고춧가루를 뿌린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정식 양반가의 가정요리가 아닌 지극히 간편화된 것이 국밥으로, 장시의 발전과 함께 객줏집과 주막 등에서 번성한 음식으로 보인다.

참고 : 김상보, 「조선시대의 음식문화」, 가람기획, 2006

■ 지역별 소고기국(밥)

▸ 경기도 안성소머리국밥

경기도 안성소머리국밥

안성은 개성, 수원과 더불어 조선시대 3대 장터로 소고기국밥이 유명한 곳이었다. 이 안성소머리국밥은 사골뼈를 끓이다 소머리와 양지를 넣고 더 끓이는 조리방식을 선택한다. 여기에 대파, 토란, 콩나물, 양념을 넣는데 여기에 특히 무청을 많이 넣는 것이 안성소머리국밥(안성탕)의 특징이다.

▸ 곤지암소머리국밥

곤지암소머리국밥

경기도 광주지역은 조선시대 과거보러 가기 위한 관문으로 소고기국밥이 유명하였다고 한다. 안성소머리국밥과 끓이는 조리법은 비슷하나 이 국밥은 사골뼈와 소머리만 쓰고 양지는 넣지 않으며 각종 야채 없이 무만 가지고 시원한 맛을 낸다.

▸ 공릉장국밥

공릉장국밥

한국전쟁 때부터 우(牛)시장의 중심지였던 경기도의 공릉장터는 개성과 오산 등 전국 각지로 흩어지는 시장터로 각지에서 모여든 상인들이 간단히 먹을 수 있는 장국밥이 유명했다. 이 국밥은 보통 소고기만 쓰는 국밥과 다르게 사골국물에 소내장과 양념한 무를 넣고 거기에 선지, 콩나물, 시금치, 숙주, 고사리, 두부 등 갖은 재료를 넣어 밥을 말아낸 장터국밥이다.

▸ 충청도 공주장국밥

충청도 공주장국밥

소고기(양지머리)로 육수를 낸 다음 무를 통째로 넣고 더 끓이다 면포로 국물만 거른 후 국간장과 소금으로 간을 한 후 고기와 무를 양념하고 다시 국을 끓인 후 그룻에 밥과 국을 담고 그 위에 시금치, 고사리 도라지 무친 것과 달걀로 만든 황백지단, 실고추를 얹어낸다.

▸ 경상도 대구육개장

대구육개장

1950년대 한국전쟁으로 전국으로 알려지게 된 음식으로 소고기(양지머리)에 무, 숙주, 토란대, 대파 등을 넣고 양념해 끓여낸 모든 육개장의 원조격이라 할 수 있다. 따로국밥 소뼈나 소도가니를 고아서 여기에 소고기를 넣고 더 끓인 뒤 고기를 건져낸 뒤 다시 납작하게 썬 다음 양념을 넣고 30분 정도 끓여 국과 밥을 따로 내어 놓는 국밥으로 이렇게 하는 이유는 국물이 제 맛을 잃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 전라도 육개장

전라도 육개장

소고기를 덩어리째 삶은 다음 푹 익은 고기를 적당히 찢어 양념을 넣어 무치고 실파, 느타리버섯, 콩나물, 고사리 등을 넣고 간을 한 다음 달걀을 풀고 후춧가루를 뿌린 소고기국이다.

※ 이외에 소고기국(밥)과 다르게 국물에 양념을 하지 않고 소뼈나 고기를 우려낸 국물만을 사용하는 ‘곰탕’이 있다. 곰탕은 소의 어떤 부위를 고기를 쓰느냐, 어떤 부위의 뼈를 쓰느냐, 내장을 쓰거나 쓰지 않느냐 등 우려내는 방법에 따라 지역별로 특색을 가진다. 그래서 곰탕은 소의 모든 부위를 우려내어 한 그릇에 담아내는 한국적인 전체요리라 비유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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