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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2mark 우리 음식을 내면서

사람이 살아가는데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으로 음식과 집, 옷을 꼽을 수 있다. 그 가운데 음식은 사람이 생존하기 위한 영양소를 공급한다는 의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다.

사람은 자연 조건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먹을 수 있 는 모든 것을 음식 재료로 삼지만, 그 나라의 음식 문화는 풍토와 자연 조건의 제약을 받으면서 형성된다. 우리나라는 아시아 동쪽에 위치하여 남북으로 길게 뻗은 지형을 갖춘 반 도로, 지역에 따라 기후의 차이가 큰 자연 조건을 갖고 있다.

게다가 우리 국토는 백두대간을 비롯한 산줄기를 경계로 지역 차이가 뚜렷해 비슷한 위도에서도 서로 기후와 풍토가 달라 특성 있는 향토 음식이 다양하게 발달하였다. 아울러 국토의 삼면이 바다에 접한 까닭에 다양한 수산물이 중요한 음식 재료로 자리 잡았다.

그리고 사계절이 분명한 기후로 음식 재료가 다양하게 산출되며, 재료의 공급이 순조롭지 않은 계절에 대비한 식품의 저장법과 가공법이 발달되었다. 계절의 명확한 구분은 식생활에서 절식(節食)과 시식(時食)의 풍속을 가져왔고, 저장식을 비축·관리하는 습관을 형성하게 하였다.

게다가 한반도를 남북으로 지른 태백산맥을 경계로 동서의 차이가 뚜렷해 비슷한 위도에서도 서로 풍토가 달라 특성 있는 향토 음식이 다양하게 개발 되었다.

‘음식’이라는 말 속에는 실로 다양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예를 들어 가공되지 않은 자연의 상태로서 ‘음식 재료’와 이것에 일정한 변형을 가해 먹기 쉽도록 만든 ‘음식’ 이 있으며, 생존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 아닌 기호품으로서의 음식도 있으며, 때로는 음식과 의약이 동일시되기도 한다.

또한, 음식은 먹는 사람의 문화적·종교적·계급적 의미를 나타내기도 한다. 즉 기근이 들면 가난한 사람들은 풀뿌리와 나무껍질로 목숨을 부지해야 하지만 왕실을 비롯한 지배층의 음식과 국가 의례용 음식은 제일 좋은 재료로 격조 있게 만들어진다.

또 일반 백성들도 기억할 때나 명절이 되면 왕실 못지않은 음식을 맛볼 수 있었다. 음식이 단순히 죽지 않기 위해 먹어야 하는 기능적인 이유라면 사람은 더 맛있는 음식을 찾지도 않고, 더 보기 좋게 음식을 차리지도 않을 것이다.

자연 상태의 재료가 조리라는 과정을 거쳐 좀 더 문화적인 것인 음식으로 변화한다. 그래서 어떤 식품을 어떻게 가공 하고 조리해서 먹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품위와 문화 수준까지 구별하는 하나의 척도가 되어 왔다. 그렇기 때문에 ‘음식 문화’, ‘식생활’이라는 단어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한편, 식생활 양식은 국가 의례를 비롯하여 풍속이나 습관이 식습관의 형태로 전통을 이어왔다는 점에서 역사적 과정의 산물이기도 하다.

즉 민족 특유의 음식 문화는 일상적인 환경의 영향을 받아 형성되기도 하며, 새로운 것과 전승되어야 하는 전통적 음식 문화가 혼합되어 또 다른 형태의 음식 문화를 형성하는 역사적 과정의 산물이기도 하다.

제1장 ‘땅에서 나는 우리 음식 재료’에서는 음식을 만드는 데에 기본이 되거나 그 자체로 음식의 역할을 하는 여러 가지 음식 재료에 대하여 서술 하였다. 사람들이 가장 먼저 채집하고 재배하기 시작한 것은 곡물로, 조나 피 같은 잡곡을 제일 먼저 식용하였으나 벼의 재배로 쌀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다.

중요한 곡물을 나타내는 오곡이라는 용어는 곡물의 여러 종류를 합쳐 부르는 말인데, 시기와 지역에 따라 해당 곡물의 종류가 달랐다. 고려나 조선 시대에 들어서면 농업 기술의 변동이나 다른 요인으로 인해 품종이나 수확 면적은 변하였으나, 재배하는 곡식의 종류는 그 이전과 비교하여도 그다지 바뀌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음식의 보조 재료이자 자체가 음식이 되는 채소는 흔히 곡물이 조리된 밥에 대해 반찬으로 쓰인다. 채소는 곡물과 달리 고고학적 유물을 찾기 어려워 문헌 자료에 의지할 수밖에 없으며, 게다가 단편적인 기록만이 여기저기 흩 어져 있어 자세한 내용을 알기 어렵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고대부터 재배하여 먹었던 채소의 종류는 크게 오이, 가지, 박, 마늘, 생강, 부추, 겨자, 파, 토 란, 아욱, 순무, 미나리 등으로 지금까지 크게 변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조선 후기가 되면 고추나 고구마, 호박, 감자, 토마토 등이 전래되어 중요한 채소로 자리 잡았다.

또한, 채소는 점차 수요가 커지면서 재배 면적도 늘어나고 그에 따라 활발하게 유통되었다. 나무에 열려 그대로 식용할 수 있는 과일도 빼놓을 수 없는 음식이다. 그래서 과일은 재배하기 보다는 채집하는 대상이라는 생각이 오랫동안 전해 왔다.

또 우리나라 풍토상 재배하기 어려운 귤이나 포도 같은 과일은 쉽게 구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귀하게 여겼다. 이후 과수의 여러 가지 이로운 점과 국가의 재배 권장으로 생산이 증가하였지만, 그래도 과일은 흔히 먹을 수 있던 음식은 아니었다.

복숭아, 오얏, 살구, 밤, 도토리. 대추, 배, 잣, 호두 등은 예로부터 비교적 흔하게 접할 수 있던 과일이었다. 그 중 밤이나 도토리는 오랫동안 저장할 수 있어 구황 식품으로 매우 중요한 식량이 되기도 하였다.

각종 식물성 재료 외에 전근대 사회에서 귀하게 여겼던 고기 종류는 소, 말, 돼지, 개, 닭 등의 가축과 각종 야생 동물이었다. 그렇지만 말은 군사용이나 교통수단으로, 소는 농업용으로 아주 중요했기 때문에 국가 차원에서 관리하여 식용하기 어려웠다.

그보다 손쉽게 먹을 수 있는 것은 집에서 흔히 기르는 개, 닭, 거위, 오리 등의 고기였고, 사냥을 통해 야생 동물의 고기를 얻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고기는 얻기 힘들었을 뿐 아니라 때로는 종교적 이유로 식용을 금지하기도 하였다.

이 장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조리된 음식이 아니라 그 음식의 재료가 되는 식량에 대한 것이다. 조리된 ‘음식’이 아닌 자연 상태의 음식 재료가 이 책의 앞부분에 들어간 이유는 음식이 조리되기 전의 상태, 곧 음식 재료에 대해서는 음식사 연구에서 가볍게 생각하는 경우가 종종 있어 이에 대해 관심을 환기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결국 이 장에서 설명하고 있는 곡물, 채 소, 과일, 가축은 이 책에서 서술하게 될 모든 음식의 기본이 된다.

제2장 ‘국가 의례와 음식’에서는 국가적 차원에서 행하는 의례와 그에 관련된 음식을 다루었다. 현재 우리의 생활 풍습 중에는 조선 시대의 유산들이 많이 남아 있으며, 전통적인 의례라고 알고 있는 관혼상제(冠婚喪祭) 역시 그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반면에 국가 의례였던 오례(五禮)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매우 생소하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이는 국가 의례가 일반 가정 의례와는 매우 다른 형식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굴곡의 근 현대사를 겪으면서 왕실 문화가 잘 보존되지 않았던 것에 큰 원인이 있다.

국가 의례의 형식과 절차는 길례(吉禮), 가례(嘉禮), 빈례(賓禮), 군례(軍禮), 흉례(凶禮)의 다섯 가지로 구분할 수 있는데, 조선 시대에 편찬된 『국조오 례의(國朝五禮儀)』에 잘 정리되어 있다.

길례는 제사를 지내는 의례인데, 가장 중요하게 여긴 제사는 역대 왕들의 신주를 모신 종묘(宗廟)에 지내는 제사와 토지신과 곡식신의 신주를 모신 사직(社稷)에 지내는 제사였다. 이러한 제사에는 다양한 제기에 여러 가지 음식을 올리는데, 이때 제기나 음식들은 각각 특별한 의미를 갖고 있다.

가례는 왕실을 비롯하여 나라 전체가 기뻐해야 할 일들에 관한 의례를 포함하고 있어 가례에 필요한 음식은 주로 잔치 음식이 많다. 빈례는 외국에서 오는 손님 즉 사신을 접대하는 의례가 중심이 된다.

특히나 조선 시대에는 사대교린(事大交隣) 정책을 펴게 되면서 중국에서 오는 사신에 대한 접대가 중요한 의례로 자리 잡게 되었다. 따라서 사신들에게 대접했던 평범한 일상식에서부터 특별한 접대를 위한 연회식까지 다양한 음식이 등장한다.

군례는 군사와 관련된 의례이다. 고려 시대의 군례는 군대의 출정 의식이 중심 내용이었으나 문치주의를 지향했던 조선 시대에는 그 대신 대사례(大 射禮)가 군례에 포함되었다.

대사례에는 다른 의례처럼 음식을 차리지 않지만, 활을 잘 쏘거나 못 쏘는 것에 따라 상이나 벌로 향온주(香醞酒)라는 술을 마셨다. 흉례는 장례와 관련된 의례로, 국가의 상례인 국장(國葬)과 관련된 내용을 주로 한다. 그에 관련한 음식은 전(奠)과 상식(上食), 그리고 각종 제사에 따르는 제사 음식 등이다.

이 장에서 살펴본 국가 의례 음식은 조선 왕조를 마지막으로 전근대 사회의 국가 의례가 사라졌기 때문에 우리에게 생소하기 짝이 없다. 그러나 전통 문화, 그 중에서도 최고의 문화를 이해하는 데에는 국가 의례의 음식이 작은 보탬이 되리라 생각한다.

제3장 ‘특별한 날, 특별한 음식’에서는 인간의 일생에서 겪는 여러 가지 의례에 따르는 음식을 살펴보았다. 통과 의례(一生儀禮, rites of passage)는 사람이 태어나서 생을 마칠 때까지 크고 작은 단계를 지날 적에 치르는 여러 가지 의식이나 의례를 말한다.

즉, 태어나서 자라고, 성인이 된 뒤에 혼인을 하고, 늙어서 회갑잔치를 거쳐, 마침내 죽음에 이르는 모든 과정 곧, 평생 동안 치르게 되는 의례들을 두루 일컫는다.

통과 의례의 진정한 의미는 생의 한 마디마다 하나의 의례를 치르고 그 마디를 넘길 때마다 그 사회의 전통에 따라 각각 새로운 역할에 따른 대우를 받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나라에서는 통과 의례를 흔히 관혼상제라 하여 세시 의례와는 다른 것으로 여긴다.

하지만 통과 의례는 출생부터 죽음에 이르는 생의 마디에 서 거쳐야 하는 중요한 과정이기 때문에 전통적으로 통과 의례로 여겨 온 관혼상제 이외에 출생 의례와 회갑례(回甲禮)를 포함시켜야 한다.

제례(祭禮)는 후손들이 올리는 것이므로 통과 의례라고 볼 수 없으나, 전통적으로 통과 의례의 연장선 위에 있는 의례이므로 넒은 의미의 통과 의례로 간주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통과 의례는 출생 의례(출생, 삼칠일, 백일), 생일 의례( 첫돌, 회갑), 혼례(회혼례), 상례, 제례 등으로 구분하였다.

의례는 모든 사회에 존재하지만 사회 구조나 문화의 차에 따라 각각 규범 화된 의식이 있고, 강조하는 의례가 다르며 절차 또한 다르다. 이들 의례에는 음식이 뒤따르기 마련인데, 이를 의례 음식이라 한다. 각 의례 음식에는 그 의례의 의미를 상징하는 특별한 양식이 있다.

의례의 형식은 나라와 민족, 그리고 문화 형태나 시대에 따라 달라지게 마련이다. 하지만 이러한 의례에 관련된 풍습, 특히 음식 문화는 지금도 면면히 지켜져 내려오고 있다.

통과 의례에 따르는 음식은 여럿이 더불어서 먹고 마심으로써 상호간의 우정과 의리를 돈독히 쌓게 하여 공동체 구성원을 좀 더 견고하게 결집시키게 된다. 또한 음식을 주고받는 것은 정치적·계급적·경제적 관계를 보여 주는 행위가 된다.

그리고 음식의 사회적이고 심리적인 맥락과 음식에 대한 생산, 유통, 소비 등이 진행되는 과정은 생애 주기와 개인 간의 관계, 그리고 사회적 집단의 구조 등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는 것이다.

제4장 ‘명절 음식, 그 넉넉함의 향연’에서는 절기에 따른 음식 문화를 다루었다. 『예기』 「내칙편」에 보면, “밥 먹기는 봄같이 하고, 국 먹기는 여름같이 하고, 장 먹기는 가을같이 하고, 술 마시기는 겨울같이 하라.” 하였다.

이 말은 밥은 따뜻하게 먹고 국은 덥게 하여 먹고 장은 서늘한 곳에 보관하며 술은 찬 것이 좋다는 의미로, 먹을 거리를 계절에 빗대어 설명하고 있다.

또한 “무릇 봄에는 신 것이 많고 여름에는 쓴 것이 많고 가을에는 매운 것이 많고 겨울에는 짠 것이 많으니, 맛을 고르게 하면 미끄럽고 달다.” 고 하였으니, 계절에 따라 맛을 조절하면 입맛을 돋울 수 있다는 의미이다.

사계절이 뚜렷한 우리나라에서는 계절에 따라 생산되는 재료로 음식을 만들어 먹었다. 그리고 일 년을 단위로 반복되는 세시풍속 안에서 특별한 날을 정해 놓고 이를 명절로 삼아 그에 맞는 음식을 만들어 먹었다.

이를 절식(節食)이라고 하는데, 절식은 이렇게 제철에 나는 재료로 만드는 계절 음식을 뜻하기도 하고, 명절에 먹는 음식을 의미하기도 한다. 우리나라의 명절은 농사력(農事曆)과 맞물려 농민들에게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여유가 되고, 농사의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

이처 럼 계절성이 강조된 명절을 더욱 여유롭고 풍성하게 해 주는 것이 바로 명절 음식이다. 전근대 시기 명절이라고 꼽을 수 있는 때는 정월에 설날과 대보름, 2월에 한식, 3월에 삼짇날, 4월에 초파일, 5월에 단오, 6월에 유두, 7월 에 백중, 8월에 추석, 11월에 동지 같은 것이다.

설날, 추석 등은 아직까지도 우리 민족의 큰 명절로 남아 있으나 다른 명절은 행사나 축제에서 행해지거나 일정한 풍습과 음식 정도만이 남아 있는 경우가 많다. 이처럼 명절은 세월이 지나면서 중요하게 여기는 정도에 차이가 생겼지만 몇몇 풍습과 음식으로 현재까지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이는 농경 사회에서 산업 사회로 중심 구조가 변화함에 따라 전통적인 명절이 의미를 잃어 갔기 때문이겠다. 그러다보니 밸런타인데이나 크리스마스와 같은 날들이 새로운 명절로 등장 하고 있다.

이 장에서 다루는 대상은 전근대 시기 여러 명절 중에서 현재까지 의미를 지니고 전승되고 있는 음식이나 명절의 의미는 퇴색되었지만 명절 음식이 남아 있는 경우로 하였다.

곧 정월에 설날과 대보름, 3월에 삼짇날, 5월에 단오, 6∼7월에 삼복, 8월에 추석, 11월에 동지의 일곱 항목을 선택하여 그 날의 의미 있는 명절 음식을 서술하였다. 명절 풍속과 음식은 지역과 나라, 민족 사이에 현저한 차이가 있으며 이러한 차이가 한 국가나 민족의 일 체감을 강화시켜 준다.

또한 명절 풍속은 사회적 지위나 경제적인 차이에 따라 향유할 수 있는 계층이 구분될 수도 있지만, 명절 음식은 보통 이와 무관하게 누구나 먹을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명절 음식은 음식 문화를 이해하는 데에 가장 기본이라고 할 수 있겠다.

우리나라는 1896년 태양력을 채택하기 이전까지 줄곧 태음력을 사용하였다. 태음력은 달의 차고 기우는 것에 따라 날짜를 정하는 역법인데, 한 해 농사의 진행 과정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우리나라의 세시풍속은 달의 변화와 관계가 있어 월령(月令)이라고도 하며, 태양력이 아닌 태음력을 기준으로 하고 있다. 명절도 세시풍속 속에서 정해지는 것이므로 당연히 태음력을 기준으로 하여 정해진 날짜이다.

이 장에서도 태음력에 따라 내용이 전개되므로 현재 인식하고 있는 태양력과 혼란이 없기를 바란다. 태음력으로는 대개 1월부터 봄이 시작하여 3개월씩 사계절을 이룬다. 곧 1·2·3월이 봄, 4·5·6월이 여름, 7·8·9월이 가을, 10·11·12월이 겨울이다.

열두 달을 3개월씩 나눠 사계절을 만드는 방법도 실제 우리가 느끼는 계절과 조금씩 다른 부분이 있기 때문에 자료를 갖고 서술하는 데에 한계가 있을 수 있다. 이는 서술상의 오류가 아님을 밝혀 둔다.

제5장 ‘천년을 함께한 차’에서는 우리 음식 문화 가운데 기호품, 특히 오랜 전통을 갖고 있는 차에 관한 글이다. “차나 한 잔 할까?” 했을 때, 우리는 흔히 분위기 있게 꾸민 카페, 찻잔에 담긴 향긋한 커피의 향과 같은 서구적 이미지나, 동전을 넣고 단 몇 초 만에 나오는 자판기 커피 같은 이미지를 먼저 떠올리곤 한다.

이렇듯 우리 머릿속에서 인식하는 차는 곧 커피이다. 그러나 최근 차의 뛰어난 효능이 밝혀지고, 소위 ‘잘 먹고 잘 사는’ 웰빙 문화에 힘입어 차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높아졌다.

외국계 커피 전문점에서도 녹차 음료를 팔고, 차를 이용한 음식뿐 아니라 녹차 비누, 녹차 화장품 같은 생활 용품까지 인기를 끌고 있으며, 차를 즐기는 사람들도 많이 생겼다. 커피 일색이었던 우리나라에서 어느새 차 문화가 대중화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차 문화의 전통을 되살릴 수 있는 좋은 기회이며, 우리나라 차 문화를 살펴보고 그 의미를 짚어 볼 때이다. 이 장에서는 우리 역사 속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남아 있는 차 문화를 찾아 그 안에 담긴 선조들의 생각과 행동에 가까이 다가가고자 한다.

먼저 각 시대의 차와 관련된 여러 요소를 종교·사상·예술·학문 등의 다양한 시각 에서 살펴보고, 각 시대별 차 문화의 특성을 정리하였다. 고대에서 차의 전래와 발전은 모두 불교와 깊은 관련이 있다. 차는 불교 공양물로 사용되어 불교 조각에서도 차 공양상을 자주 볼 수 있다.

고려 시대에는 독창적인 차 문화가 유명하였다. 고려 왕실과 국가 의례, 그리고 고려인들의 일상생활까지 깊숙이 스며들어 있었던 차 문화를 찾아볼 수 있다. 흔히 알듯이 조선 시대에 차 문화가 쇠퇴하거나 소멸한 것은 아니었다.

선비들과 승려들 사이에 차 생활이 이어졌고, 이들을 중심으로 다회, 다정, 다례가 많이 이뤄지고 있 었다. 조선 시대 차 문화는 추사 김정희와 초의 선사가 차로 맺어진 인연에서 빛을 발한다. 차는 이들의 우정을 학문과 예술로 승화시켜 주는 역할을 하였다.

선조들이 남긴 차 문화를 보면 차는 단순한 마실 거리가 아니었고, 인간의 정신 세계와 예술의 경지로까지 이어진 것을 볼 수 있다. 그들은 차 한 잔으로 몸과 마음을 맑고 깨끗하게 하였으며, 깨달음을 얻었으며, 예를 실천했고, 신선의 경지에도 이르렀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의 차 문화를 두고 우리 문화가 아니라 일본이나 중국 문화가 반영된 것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중국의 영향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 고유의 독특한 차 문화를 발달 시켰고, 나중에는 중국·일본 등 다른 나라에 영향을 주기도 하였다.

우리 나라 고유의 차 문화가 존재하지 않았거나, 외국의 차 문화가 주로 반영되 었다는 생각은 차에 관한 역사를 극명하게 해석해 줄 수 있는 자료의 부족과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전통 문화의 단절, 그리고 그동안의 관심 부족으로 우리나라의 차 문화사가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데서 나온 오해이다.

그렇다고 불분명한 자료를 통해 차의 전래와 발달 시기를 올려놓거나, 차의 수요층을 일반민들까지 확대시켜 놓는 등 우리 차 문화 역사를 과장시켜서는 안 될 것이다. 차나무는 기후와 토질 등 환경의 영향을 많이 받기 때문에 재배가 어려운 작물이다.

따라서 차 종자를 심는 것이 차의 발달 또는 토산 차의 대량 보급 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또, 고대에는 차를 대부분 수입하였기에 비싼 물품이었고, 차를 끓이기 위해 필요한 도구와 연료를 생각해 볼 때 일부 상류 계층에서 마실 수 있었을 것이다.

역사가 오래되었다고 우수한 문화가 아니며, 일부 계층만이 누렸다고 문화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 문 화에 내포된 내용과 의미가 무엇인지 알고 제대로 계승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이렇듯 국가적 차원의 의례에서부터 개인적 기호를 즐기기 위한 기호품까지, 음식은 삶의 여러 부분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자리 잡는다. 하여 음식은 그 시대의 모습을, 사회의 문화를 반영하여 만들어지고 변하고 없어진다.

그러기에 시대를 감싸 안는 넉넉한 단어가 된다. 글 읽기에 앞서 밝혀둘 것은 차(茶) 자의 발음에 관한 것이다. 차(茶)는 ‘차’로 읽기도 하고, ‘다’로 읽기도 한다.

차 문화(茶文化), 차 공양(茶供 養), 차향(茶香)과 같이 가능한 한 ‘차’로 읽었으나, 말다(抹茶), 점다(點茶), 다식(茶食) 등 한문 구성으로 이루어지거나 통상적으로 ‘다’로 읽는 경우에는 ‘다’로 읽도록 하였다.

* 숙명여자대학교 교수 박 종 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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