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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조리서 이야기 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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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hapter 7. 서지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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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2mark 원저자와 저작권자

3장에서는 음식생활 연구의 사료로 많이 이용되었으나, 독자적으로 연구되지 않은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의 외적 형태와 서지 사항 그리고 내용 구성을 검토하고자 한다. 1절에서는 서지사항을 바탕으로 하여 조선요리제법과 마찬가지로 저자-편집자-출판사-광고를 중심으로 한 책의 유통 과정을 살핀다.

특히, 원저자인 이용기와 저작 겸 발행인인 강의영을 분리하여 서술할 예정이다. 기존의 연구는 저자인 이용기에게만 초점이 맞춰져 있었으나, 저작권을 가지고 있던 강의영을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과 연관시키지는 못했다.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을 둘러싼 저자와 편집자 간의 관계를 고찰하고자 한다.

2절에서는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의 내용 구성에 관한 부분이다.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의 목차가 어떤 방식으로 체계화되었는지를 항목별로 분석한다. 또한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의 서술 방식을 유형별로 나누고, 4장에서 본격적으로 다룰 내용 비교의 단초로 삼는다.

3절에서는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의 요리법 및 기타 내용을 다른 요리책과 비교하고, 그 지식이 어떻게 전승되었는지에 대한 양상을 정리한다. 가장 먼저 요리명이 같은 요리법을 찾는 동시에 요리명이 달라도 요리법도 함께 대조하여 동일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는지의 여부를 밝히고, 어떤 방식으로 내용이 옮겨갔는지를 유형별로 정리하고자 한다.

1) 원저자와 저작권자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朝鮮無雙新式料理製法)은 제목을 풀이하면 ‘조선에 둘도 없는 새로운 방식의 요리 만드는 법’이라는 뜻이다. 임원경제지 정조지를 보고 집필한 것으로 알려진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은 4판까지 중간된 요리책으로 알려져 있다.

이성우는 『한국식경대전』에서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은 전통음식에 시대의 조류를 융화시켜 온고지신의 정신이 살아있는 작품”이라고 해제를 달았다. 즉, 저자가 과거의 고전을 보고 참조하였으며 또한 스스로 그 요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직접 덧붙였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연구에서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의 저자가 이용기라고 설명하고 있으나, 실제 저작 겸 발행자가 따로 존재한다는 사실은 잘 알려진 적이 없다.139) 판권에 적혀있는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의 저작 겸 발행자는 이용기가 아닌 강의영(姜義永, 1894~1945)이다.

영창서관의 주인인 강의영은 세창서관에서 일을 배우다가 1918년 22살이던 때에 단성사 옆자리 종로 2가에 문을 열었다. 해방 후 얼마 되지 않아 사망하였으며, 그 이후에는 아들 강달성이 2대에 걸쳐 서관을 운영하다.140) 강의영은 책의 저작권과 판권을 저자나 다른 서관에서 구입·매매한 일이 많았다.

따라서 영창서관에서 발행된 책에서 강의영이 저작 및 발행인으로 자주 나타나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이다.141) 이용기(李用基, 1890~1933?)는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의 원저자로 상정할 수 있다.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이 시작되는 ‘밥 짓는 법’ 바로 옆에 “위관(偉觀) 이용기(李用基) 찬(撰)”이라는 문구는 실제 이용기가 요리법을 작성했음을 나타낸다.

‘찬(撰)’은 ‘짓다’, ‘기록하다’라는 뜻이 있으며 ‘著’, ‘術’, ‘作’ 등의 글자와 같이 저자의 기록행위를 나타내는 사용되는 단어이다.142) 이용기는 실제 지적작업자였으나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의 저작권자는 아니었다.

방효순은 낭독의 책 읽기 방식이 청자 위주로 구성되어 있으므로, 들어도 효력이 없는 원저자의 이름은 소용이 없고 무단복제를 금할 수 있는 저작권자의 역할이 더 중요하다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이 저작권자들에게 판권을 파는 “원저자”를 두 유형, 즉 1) 판권비를 목적으로 하는 ‘일이 없는 식자층’인 원저자와 2) 실제 저작하지 않더라도 기존에 이미 출판된 책을 재구성한 원저자로 나눈다.143)

이 중 이용기는 1번의 중간 성격에 해당되는 저자로 판단된다. 실제 이용기가 판권비를 필요로 했기 때문에 판권을 팔았는지는 불명확하며, 판권을 영창서관의 주인인 강의영에게 어떤 방식을 통해 팔았는지의 여부도 알 수 없다.

가) 원저자 이용기

이용기의 자세한 이력은 알 수 없다. 단 식민지시기 이용기의 행적은 저작물과 조선어학회 활동을 통해 규명된 바 있다. 특히 가사를 수집하여 필사한 『악부(樂部)』가 잘 알려져 있었기에,144) 국어국문학에서의 관심과 함께 그의 저술 활동에 관심이 모아졌다.

『악부』는 이왕직 아악부에서 조선아악(朝鮮雅樂)과 관련된 참고도서로 사용되었으며, 이용기가 수 년 동안의 노력을 들여 편찬하였다고 한다. 이용기의 행적은 『악부』에 기록 된 손진태(孫晋泰, 1900~1950?)의 기록과 시조학자인 이은상(李殷相, 1903~1982)의 인터뷰에서 확인된다.

이은상은 이용기가 경성 토박이이며 풍류를 좋아하였지만 주색에 빠지지 않은 풍류객이었다고 평가했다. 또한 이용기는 최남선, 권상로 등과 교류하였으며, 가요를 수집한 『악부』와 한시문을 모은 『연구집(聯句集)』을 작성하였다.

많은 장서를 소유하였다고 하며, 소설은 약 2,000여 권을 소장했다고 한다. 국어학자 권덕규(權悳奎, 1890~1950)도 이용기와 각별한 사이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는 매일신보 1935년 11월 21일자 1면에 이미 세상을 뜬 이용기를 추억하는 장편기사를 실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위관(偉觀)이라 하면 서울에서 어떤 사람이나 대개 아는 이이다. 이를 그만큼 알게 되는데 무슨 까닭이냐 하면, 그가 무슨 문자가 대단히 있거나, 풍채(⾵神)가 좋거나, 큰 오입쟁이거나, 말을 잘 하거나, 무슨 딴 재주(才操)가 있거나 썩은 짚신짝을 개소문(蓋蘇⽂: 연개소문)의 것이라고 3천원에 양(⽺)코를 속여먹고 박(朴)누구-협잡(挾雜)군-그런 것도 아니요, 그러면 궁예(⼸裔)처럼 키가 커서 단칸방에서는 자지를 못하거나, 이낙하(李落下)145) 모양으로 눈이 부리부리하고 광채가 번쩍번쩍하여 귀양을 가게 되었거나, 편쌈 잘하든 태(太)곰보 모양으로 진상(進上) 오는 꿀병 얽듯 얽어매고 찍어매고 한 것도 아니요.

그가 키가 작다하되 좀 작달막하다뿐이지, 평양감사 다담상(茶啖床, 손님 대접을 위해 차린 상) 밑에서 보이지도 아니하던 김유(⾦瑬, 1571~1648)와 같은 바도 아니었다. 그러면 그가 생전에 가끔 어느 문사의 틈에 끼어 알만한 연회석(宴席)에 참여하게 되기는 무슨 까닭인가.

그의 장기(⾧技)를 취하여 그랬다 하면 그가 음식 솜씨가 있고, 자질구레한 이야기 곧 잡담이 일수(⼀⼿)일 것도 하나이요, 또한 문자의 섭렵도 그 방면으로 하여 들을 것이 있으며, 더 나아가 말하면 여항(閭巷)의 풍속, 더욱 서울 대가(⼤家) 양반의 집 이야기, 또 더 궁중의 이야기도 많이 아는 고(故)로이며, 이런 이야기를 그만두고 실상 그의 이야기를 한다 하면 한말(韓末) 망명객(亡命客)들을 좇아 해외에 놀았음으로 그 방면의 이야기를 알아 그들의 내력을 들을 수 있으며, 해외의 지식을 겸한 고(故)로이다.

이 문단에서 권덕규는 이용기가 어떤 이유로 경성에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는지를 설명해주고 있다. 이용기가 문사의 집에 대접할 수 있을 정도로 명망을 얻은 이유는1) 그의 음식 솜씨와 2) 잡담거리를 많이 알고 있었고 3) 문자(한문)를 섭렵하고 있으며 4) 여항의 풍속, 서울 양반, 궁중 이야기를 많이 알고 있으며 5) 한말 망명객들을 쫓아 해외에 있었기 때문에 해외의 이야기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중 잡담거리와 여항의 풍속 등의 이야기를 많이 알고 있었다는 것은 그가 『악부』를 필사한 것과도 연관이 있는 듯하다. 또한 이를 통해 그의 음식 솜씨가 좋았으며, 한문을 잘 알고 있어 앞선 책을 읽을 수 있을 정도의 문해력을 갖추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그가 해외에 체류했다는 사실도 이에서 드러난다. 이어지는 다음 내용에서 권덕규는 이용기의 음식 대접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그가 그 천품(天稟)의 재치(才致)로 가끔 사람을 속이고 골리기도 하는데, 이것은 정말로 속이는 것이 아니라 장난(作亂)으로이다. 한 번은 자기의 집에 음식이 좀 있으니 놀러오라고 몇몇 친구를 청하였다. 그 때에 그의 집은 하남촌(下南村: 현 장충동)이다.

여러 친구들의 말이 다 ‘옳다. 오늘은 위관(偉觀)의 청이니까 솜씨 있는 음식을 좀 먹겠다. 그 어려운 분이 어떻게 준비를 하였나. 자- 우리 가보자.’ 먹는 것보다 음식 솜씨도 볼 겸하고 떠났다. 가서 보니 집은 말할 수 없이 쓸쓸하다.

그야 그러렷다. 한사(寒⼠: 가난한 선비)의 살림인바에야 왜 말이 있으랴. 일행을 마저 고두름방(고드름방)에 쓸어 넣었겄다. 한참 있다가 안을 향하여 말하기를 그- 무엇 되었거든 내오너라 하였다.

상이 들어오는데, 그야말로 쥐코 상이라고 물론 지령(간장)에 김치에 새우젓인지 무슨 젓인지 삭아빠져 무엇인지 알아 볼 수 없는 젓갈 두어 점을 놓았겄다. 그리고 소주 한 병을 가져다가 따라 권하였다. 여럿이라 두어 잔씩 돌고 상은 치웠다.

일행이 의아하여 아마 장난이 천흥철(千興喆)이 세배 온 기생 골리듯이 이렇게 잡아 앉히고 나중에 정말 다담(茶啖: 다과)이 나오려니 하고 속심들만 차리고 앉았으나 그만 감감하다. 그 동안에 우스개는 많았다. 일행이 참다 못하여 무엇 좀 안 주느냐 물었다.

그의 대답이 안 되었지만은 술이 한 병 생겼기에 “⾒西須柏憶”으로 여러분과 같이 만나자 한 것이지 내가 무엇이 있나 하였다. 그만이다. 일행은 할 수 없이 나섰다. 술은 자꾸 취한다. 생일잔치 먹자고 이레를 굶은 셈으로 잔뜩 차리고 빈속에들 갔다가 지독한 소주에 감기어 중도에서 개천에 빠진 사람에 길을 잃어 허달 사람에 야단이 났었다.

이것도 그가 고인의 장난법으로 한 번 친구들을 속여먹은 것이다. 얼마 뒤에 그의 환갑이다. 이 때는 자기의 마지막 잔치라 하여 음식을 참 잘 차리었다. 모두가 과연 그 솜씨에 놀랐다. 아- 자기 집에서 그의 잔치로는 그만 마지막이 되고 말았다.

이용기가 사망하기 바로 이전 거주했던 집은 하남촌 즉 현재의 장충동이었다. 그곳에 친구들을 초대했을 때 친구들이 그의 음식솜씨를 기대했을 정도로 이용기 본인이 음식을 잘 만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장난으로 초라한 음식을 대접하고 난 얼마 뒤 이용기의 환갑잔치 때는 맛있는 음식을 많이 차려 그 솜씨를 내보였다고 한다.

1875년생으로 알려진 이용기는 1933년경쯤 사망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1933년도는 이용기가 59세일 때이다. 이용기가 환갑잔치를 열었고 그것이 마지막 잔치였다는 점을 미루어 볼 때 1934년이 그의 사망연도일 가능성도 제시해 볼 수 있다. 이용기는 말년에 가난한 삶을 살았으며 가재도구를 많이 갖춰놓지 못하여 집이 “쓸쓸하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그가 음식을 먹으면서도 자질구레한 이야기- 음식 이야기에도 그런 이야기가 많다. 옛적에 아무는 지렁이를 잘 먹고 (문제에 나온) 강릉 살던 아무개는 손톱 발톱을 잘 먹고, 누구는 괴이한 물건을 잘 잡수어서 잡것이야 잡것하고 떠들었다.

그리하면 옆에서 사람들이 저런 소리가 일수(⼀⼿)야 병이야 하고 핀둥이를 준다. 그리하면 그는 저것보아, 저런 듣기는 남보다 더 좋아하며- 그러지 하고 또 계속한다.

조선뿐일까, 지나(⽀那: 중국) 문적을 보면- 지나에는 헌 대딱지 먹는군, 똥 속의 깨알을 다- 주어 먹는 놈이 있었는데 하며 말을 이으려하면 옆에서 그만두어 그만두어 하여 웃고 떠들게 된다. 대개 이만하면 그의 전형을 엿볼만하다.

이 몇 줄거리는 11월 조광(朝光) 창간호에 변태 식욕보(變態 ⾷慾譜)란 제목 하에 적혔으니, 이나마 좀 자세히 보실 분은 조광을 보시는 것이 좋겠으며, 이 원고는 여기 문제되는 위관(偉觀)의 원고- 잡동사니, 가게장이 장책(帳冊) 매듯한 꾸러미 속에 든 것으로 노산(鷺⼭, 이은상)이-추려다 다듬은 것인가 한다.

이것은 대개 노산이 위관의 원고를 전수(全數) 차 왔음으로 말이며, 나로는 위관(偉觀)을 소개하는 길에 하는 소리이다. 이는 이만하고. (…)

이용기가 음식 이야기를 많이 알고 있었으면서 괴이한 식성에 대한 이야기도 서슴치 않고 대중에게 이야기했다는 것이 이 일화를 통해 드러난다. 그는 문자에 능했기 때문에 조선의 문헌과 중국의 문헌을 다수 읽었으며 이런 일화를 책에서 많이 얻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용기는 이를 원고로 어느 정도 정리했던 것으로 보인다. “위관의 원고…꾸러미 속에 든 것으로 노산이 추려다 다듬은 것인가…”라는 문장에서 이용기가 필사본 『악부』처럼 필사한 것이 많았으며 이를 이은상이 가지고 있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또한 그의 음식 대접 일화와 함께 이용기가 장난기가 많았다는 점도 알 수 있다.

(…) 위관(偉觀), 그는 이 밖에도 지렁이에 대한 지식이 많았다. 잠깐 옮기면 창란젓은 지렁이 같아서 흉하고 어떤 부족은 지렁이를 먹고 산지렁이를 쪄서 어떤 헌대에 부치면 직효요, 무슨 피부병에는 지렁이 뜸질이 좋다는 둥,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이 있었다.

그런데 문제를 ‘지렁이를 보고 위관(偉觀) 생각’이라 하였느냐 하면 그가 채분암(蔡焚庵)이 흉하다는 이야기를 한 번 하였다. 분아(焚庵)이 한 번 여러 친구(賓朋)와 이야기하다가 우암(尤庵)선생이 그 제자 주배형제(朱裴兄弟)를 작별하는 ‘송이주군서(送⼆朱君序)’의 내용을 예로 들어 말을 하였다.

위관(偉觀)이 이야기를 하며 그 텁석부리 입을 벌려 낄낄거리던 생각이 나며 이 글을 초(抄)하던 어제 저녁에 비가 얼마간 오더니, 아침에 웬 지렁이가 길바닥에 수없이 나다닌다. 그리하야 나는 위관(偉觀)의 분암(焚庵) 평을 하던 것과 아무는 지렁이를 잘 먹고로부터 지렁이 이야기 하던 이 두 가지를 아울러 문제를 잡은 것이다. 위관은 이용기(李⽤基) 노인(⽼⼈)의 호이다.146)

권덕규의 회고에 의하면, 이용기는 1935년 이전에 사망하였고 권덕규보다 높은 연배의 사람이었다. 또한 음식 솜씨와 풍속 관련 이야기를 많이 알고 있다는 것으로 경성에서 잘 알려진 인물이었다.

특히 지렁이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는 대목에서, 한문 지식이 상당했으며, 고전도 많이 탐구한 것으로 보인다. 음식 솜씨에 관한 일화는 음식에 대한 관심이 높았던 것을 반증하며 이 관심이 요리책 출판으로 이어졌다는 것으로 추측 된다.

1924년은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 초판이 출간되는 해로, 이용기는 1924년 이전에 원고를 완성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 『악부』는 1920년 전후로부터 수집이 되어, 1926~1928년 사이에 남들이 참고할 수 있을 정도로 모습을 갖추었다.

이은상의 증언에 의하면 1928년 말 거의 다 된 악부를 가지고 이용기가 이은상을 찾아와 첨가 지도를 부탁했다. 그들은 계명구락부에서 조선어사전을 편찬하였기 때문에 만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용기는 1928년 11월부터 이 편찬 사업에 참여하였으며, 속어와 시정어(俚談) 채집 분야를 맡았다.

이 때 최남선, 정인보, 변영로, 이윤재 등의 인물과 함께 일을 하였으며, 이 중 최남선, 정인보, 이윤재는『조선요리제법』 과도 관련 있는 인물들이다. 『악부』를 보완하고 난 1933년 쯤, 이용기는 이은상에게 이 책을 20원에 판매했다.

이용기가 매우 빈한한 삶을 살았음은 이은상의 증언과 권덕규의 기사에서도 확인할 수있다. 이용기 사후에도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은 영창서관에서 3판이 출간되었으며, 『악부』는 이은상이 보성전문학교 도서관에 기증하였으며, 그 당시 도서과장은 손진태로 이용기의 이력과 책의 기증 경위를 간략히 써서 보관하였다.147)

이용기가 본인이 수년 간 공을 들였던 악부를 말년에 남에게 팔았던 것으로 보아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의 저작권도 강의영에게 본인의 의사로 팔았을 가능성이 높다. 즉, 원저자의 유형에서 1번에 해당되나, 이는 저자의 경제적인 이유에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즉 후술할 요리책 저작권 침해 소송에서 강의영이 피고가 된 이유도, 강의영이 실제 저작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920년대 중반 이후부터 비창작적 저작물의 출판물 총수가 줄고, 창작적 저작물이 증가하면서 저작권에 대한 인식도 높아졌다.

강의영은 실제 다른 책(『永遠한 無情』, 『朝鮮氏族統譜』등)에서도 저작 겸 발행자 였으나 원저자의 이름을 명시함으로써 원저자의 저작인격권은 인정하였다.148) 결론적으로 저자와 실제 출판 발행자가 다른 사례에는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이 포함된다.

나) 저작권자 강의영

강의영의 생애는 강의영의 장남인 강남형의 인터뷰를 통해 자세히 알 수 있다.149) 엽전을 만들어 납품하던 강용흠(姜龍欽, 1846~1894)과 해주 오씨(1863~1945) 사이에서 막내로 태어난 유하(有厦) 강의영은 상동교회에 있는 공옥학교(攻玉學校)를 졸업하였고, 그 즈음 박문서관에서 출판 관련 일을 배웠다고 한다.

1914년에는 왕세창과 함께 세창서관을 열고 출판업에 종사하였으며, 강의영은 1917년 다시 영창세관을 독립적으로 세워 경영하였다. 1938년 조광에 실린 영창서관 관련 기사에서 강의영은 자신이 서점을 시작한 동기에 대해 밝히는데, 별 이유가 없었으며 어려서 학교에 다닐 때부터 줄곧 이런 영업이 하고 싶었다고 한다.

따라서 특정한 종류의 책을 판매한 것이 아니라 이익을 낼 수 있는 책은 무엇이든지 팔았던 듯하다. 영창서관이 영업 세액을 많이 올리면서, 강의영은 1931년에 ‘하와이조선문고설립기성회’를 조직하여 잡지 서적을 기증하기로 하였다.

또한 1944년 이화고녀(李花高女, 이화여고)의 재단은 인수하고자 50만원 상당의 유하학원(有厦學院)을 설립하여 인가를 받았다.150)

1916년에 결혼한 아내 김홍순(金洪順, 1900~1973)이 이화고등보통학교 졸업생이었고, 둘째 딸인 강명숙이 이화고녀를 졸업한 뒤 교사로 재직하고 있었으며, 셋째 딸과 넷째 딸도 이 곳 출신이었던 인연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강의영은 1945년 5월 17일 버스에서 내린 뒤 졸도하였다가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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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출처 •농촌진흥청 국립농업과학원 •한식진흥원 •전북음식플라자 •우석대학교 식품영영학 윤계순 교수 •호서대학교 식품영양학과 정혜경 교수 •경북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백두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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