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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조리서 이야기 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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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hapter 12. 조선의 셰프 풍석(楓石) 서유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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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2mark 조선 최대의 실용백과사전

『임원경제지』는 사대부가 벼슬하지 않고 시골에 살 때 필요한 지식과 정보를 망라하여 16개의 분야로 나누어 소개하고 있다(표1). 총 113권 54책. 역사상 개인의 저술로 한 가지 주제에 한정하여 『임원경제지』 만큼의 많은 분량과 수준을 유지하는 책은 드물다.

『임원경제지』는 임원에서의 삶을 경영하는 데 필요한 내용을 다룬다. 임원은 도회지와 대비된 촌을 말한다. 농촌이든, 산촌이든, 어촌이든 관계없다. 다만 여기서 말하는 촌은 세상에서 뜻을 펼치지 못했거나, 아직 뜻을 이루지 못했거나, 뜻을 굽힌 사대부가 거주하는 공간이다.

『임원경제지』는 국가 운영과 사회 제도의 문제를 다루지는 않는다.10) 그렇다고 자연세계의 모든 지식을 이야기한 것은 아니다. 이 책에서 다루는 범위는 인간의 일상적인 삶에 한정된다.

대장부로서 모름지기 고민해야 할 국가의 통치철학이나 국가 경영에 대한 전반적인 개요를 설파하는 일을 목표로 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시골에서 사는 데 필요한 일의 도리를 대략 골라 부(部)로 나누고 제목[目]을 세워 여러 책을 뒤져서 채워 넣었다.

이 책에 ‘임원’으로 제목을 붙인 까닭은, 벼슬하여 세상을 구제하는 방법을 말하는 것이 아님을 밝히기 위해서이다.11) 위의 임원십육지 서문 에서는 이 책의 저술 의도를 나랏일보다는 집안일을 챙기는 데 있다고 했다. 어찌 보면 이런 이야기가 시시해 보이기도 한다.

집안 살림은 아녀자나 필부들이 신경 쓸 일로 인식되어 있던 당시의 상황에서는 더욱더 그렇다. 그러나 자신의 이러한 시도는, 세상의 문제를 고민한다면서 벌이는 ‘토갱지병(土羹紙餠)’보다는 훨씬 의미 있는 작업이라고 그는 믿었다.12)

『임원경제지』회는 백과사전이다. 여기에는 수식어 들이 좀 더 필요하다. 조선시대 백과사전은 관찬(官撰)과 사찬(私撰)으로 구분될 수 있다. 관찬은 관 주도의 저술로, 그 목적에 따라 규모가 상당히 커질 수 있다.

그러나 개인의 저술인 사찬은 재력이나 인력의 한계와 도서를 집중적으로 활용할 수 없는 한계상 규모가 제한적일 수 밖에 없다.

그럼에도 『임원경제지』회는 조선시대 개인이 쓴 백과사전 중 최대이다. 백과사전은 지식의 확대 및 정리를 목적으로 하는 자연·인간·사회에 관련한 지식의 집적물이다. 그 지식은 지식인이주로 새로운 지식을 창출하거나 글쓰기의 전거로 쓴다. 실생활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임원경제지』회는 그 차원에 한정되지 않는다. 이 책에 수록된 지식은 지적인 유희 이외의 실생활에 활용이 가능하다. 학문을 위한 학문, 지식을 위한 지식이 아니었다. 백과사전으로 규정되기 위해서는 우선 특정 주제에서 다루는 종류가 거의 다 망라 되어야 한다.

하지만 특정 주제라는게 워낙 다양하기 때문에 이 세상의 모든 지식을 백과사전에 담을 수는 없다. 이 세상의 어떤 백과사전도 이런 위업을 달성하지는 못했다. 특정 시기에 특정한 범위에서 다룰 수 있는 지식을 최대한 모았을 뿐이다.

제아무리 브리태니커Britanica회 라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그러나 지식을 마구 긁어 모아 놓았다고 해서 백과사전이 될 수는 없다. 그 지식들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야 한다. 이 때 정리된 지식이 얼마나 체계적인지, 얼마나 깊이 있는지, 얼마나 신뢰할 수 있는 정보를 제공하는지에 따라 백과사전의 질이 결정된다.

거기다 ‘사회적 메시지’와 ‘사회적 반향’이 있었다면 역사적 의의는 더 크다. 예를 들어, 조선후기 최초의 백과사전이라 평가받는 『지봉유설(芝峰類說)』회의 경우, 348 명의 저서를 참고했고, 2,265명의 인물을 소개했으며, 3,435개의 항목을 25부로 나누어 서술했다.

『지봉유설』 회의 방대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이 거질의 책에는 옛 사적과 인물들의 이야기가 주로 수록되어 있으며 고증과 개인의 체험이 사실을 밝혀내기 위한 주된 방법이었다. 그런데 이수광(李睟光, 1563~1628)가 이 책을 쓴 목적은 역사적 사실이나 지식을 정리하는 데에 있었다.

역사적 사실이나 지식은 또 다른 저술을 위한 정보를 공급한다는 면에서 그 활용가치가 크다. 새로운 지식을 만들어 내기 위한 기반 지식이기 때문이다. 이 지식을 실제 생활에서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식자들에게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박학한 지식인이 되게 하고, 글짓기에 참고 자료를 제공하는 데 크게 도움을 주었겠지만, 이 지식을 꿰뚫고 있다고 해서 밥이 나오는 것도, 떡이 나오는 것도 아니었다.

『지봉유설』은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정리했지만, 실제로 먹고 사는 데 도움은 안 되었다. 이보다 훨씬 방대한 『성호사설(星湖僿說)』이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역시 이와 비슷한 성격을 띤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사실 조선이 남긴 최대 백과사전은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회다. 이 책은 1770년 (영조46)에 처음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회라는 책명으로 편찬되었다가, 1790년(정조14)과 1908년에 각 각 증보되었다. 총16고(考) 250권에 달한다.

1769년에 왕명으로 시작한 이 편찬사업은 서명응, 서호수, 체제공(蔡濟恭, 1720~1799), 신경준(申景濬, 1712~1781) 등이 주도 했고, 1년도 채 안되어 13고(考) 100권을 완성했다.

그러나 급조한 나머지 착오가 많이 생겨 1782년에 정조의 명으로 재 편찬을 시작했고 1790년에 일단락 지었다. 또 정조 즉위 후의 일들을 보완하기 위해 이후 1797년까지 증보가 계속되었다. 증보 사업에는 『박학강기』로 유명했 던 이만운(李萬運, 1723~1797)이 주도했다.

이 기간에는 총 20고 146권으로 완료했으나 간행되지는 못했다. 3차 편찬은 갑오경장(1894년) 이후의 문물제도를 반영하기 위해 1903년부터 5년 동안 진행되었고 주 편찬자가 33인, 교정자가 17인이 될 정도로 많은 인력이 투입되었다.

이 책은 국가의 제도나 역사적 사실, 그리고 전고(典故)7) 등을 집성했고, 그 목적은 경국제세(經國濟世)에 있었다. 국가 운영에 필요한 지식의 집대성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증보문헌비고』회는 실용서는 실용서이자 통치를 위한 실용서였다.

지식의 정리가 주된 목표이며, 정리된 지식은 지식인의 지적 활동이나 정치, 문화적 활동을 위해 이용된다는 측면만을 본다면 『임원경제지』회는 백과사전의 성격에 꼭 부합하지는 않는다. 지식을 정리하기는 했지만『임원경제지』회의 저술 목적이 지식 정리 자체에만 있지 않기 때문이다.

지식의 수집이나 지식의 확대를 통한 지식의 집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역으로 일상적 삶의 필요를 위해 정리된 지식이 필요 했던 것이다. 『임원경제지』회는 『지붕유설』회이나 『증보문헌비고회』유와는 성격이 매우 다르다.

오로지 각 가정에서 잘 먹고 잘 사는 문제에만 집중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삶을 사람답게 영위하기 위한 지식을 모은 것이다. 인간의 삶의 방식은 아주 다양해서 조선시대에도 그 편차가 많다. 직분에 따라, 거주지에 따라, 재산의 다과에 따라 달랐다.

『임원경제지』회는 조선의 모든 사람을 독자로 여기지는 않았다. 『임원경제지』회에서 겨냥하는 대상은 시골에 사는, 그리고 앞으로 살게 될 지식인이었다. 여기에서는 양인도, 노비도, 상인도, 공인도 없었다. 여기에는 또한 여자도 없었다.

독자는 지식인인 사대부를 대상으로 했지만, 이들이 책 내용을 모두 실행 할 수 있다는 말은 아니다. 독자 대상으로 삼지 않은 사람은 사대부가 가정을 경영할 때 함께 도와주어야 할 존재들이다. 그들은 어디까지나 보조적인 역할에 한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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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출처 •농촌진흥청 국립농업과학원 •한식진흥원 •전북음식플라자 •우석대학교 식품영영학 윤계순 교수 •호서대학교 식품영양학과 정혜경 교수 •경북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백두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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