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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hapter 2. 전통 음식관(飮食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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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2mark 조선 왕실 음식

♣ 조선 궁중 음식

조선 초기에는 질병의 원인을 귀신 등에 두어 1498년의 구급이해방( )에서도 역병의 원인을 구체적으로 밝히지 못하였고 따라서 여귀라는 귀신이나 호구 마마의 소행이라고 하여 별신제, 송신 굿등을 행하는 등의 치료법을 보이고 있다. 그러다가 16세기에 중엽에 들어 질병의 원인은 귀신이 아니며, 영양장애의 해결이 가장 중요한 문제라는 사실을 인식하기 시작하였다. 그 이후 양생과 섭생을 통한 식치는 왕실과 사대부들에게 건강을 실천하는 중요한 실천 행위로 자리 잡게 된다.

우리나라 왕실에서의 식치에 대한 기록은 고려시대이후부터 나타난다. 고려시대부터 어선을 담당한 상식국에 식의가 배속되고 식치 음식을 상용하였다. 그러니까 고려시대부터 이미 식의라는 제도가 있었고 그의 근무처는 상식국이었던 것이다. 우선, 식의(食醫)가 되려면 식물의 성질과 독성 유무, 본초학과 의약 지식 가지고 있어야 했다.

조선 초까지 어선의 식치를 관장하던 식의(食醫)의 임무는 어선을 맡던 사선사의 업무에서 내의원 임무로 이전되었다. 어의였던 전순의가 다음의 2부와 3부에서 기술하는 식요찬요(食療纂要)를 저술되는 배경도 이에 기반 한다.

조선 왕실의 어의들은 대부분 무엇보다 병을 치료함에 있어서 음식의 효능을 매우 중시하였다. 왕실에서 식료가 더 중요시되었던 이유로는 첫째, 약물 오남용으로 인한 부작용 대비 및 입맛을 잃어 원기를 상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둘째, 큰 병 후 회복의미로 원기를 보하기 위해 미음이나 죽을 올리는 경우가 많았다. 셋째, 너무 오래 약을 투여하는 것이 오히려 건강을 해칠 수 있다고 생각되어 잠시 중지하고 음식으로 기운을 회복하려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조선시대 식료음식은 크게 구분하면 첫째, 한약재 자체를 음식의 재료로 활용한 경우가 있고, 둘째, 식품이 지니고 있는 풍부한 영양성분으로 인해 특정 병의 예방과 치료에 도움을 주고자 활용되는 경우가 있다. 때로는 이 두 가지가 혼용되어 사용되기도 한다. 모두 건강증진과 질병치료라는 목적을 위해 특별히 고안된 음식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다르다.

대표적 치료 및 예방 음식 음식으로 사용되던 것은 죽과 약차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치료식으로 쓰였던 것은 죽을 들 수가 있고 약차와 약용주의 상복은 예방 차원으로 널리 애용되던 방법이다. 그리고 우리가 보통 보양식으로 생각하는 특별식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약선 음식들을 살펴보면 특이하거나 구하기 힘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죽 같은 음식은 과하게 먹는 것을 피하고 소량의 부드러운 음식을 먹는 것으로 절제된 음식관을 보여주고 있어 약식동원의 실천태도를 보여준다. 보양차원에서 먹는 왕실의 식료음식의 섭취는 별도의 규정을 두어 관리하고 있었다.

특별히 신하들에게는 절기에 따라 단오날에는 제호탕과 옥추단, 동지에는 전약과 타락죽을 하사하기도 하였다. 여름철에 제호탕과 겨울철 타락죽은 왕실 품계에 따라 하사 규정이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조선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 일성록을 통해 왕실에서 어떠한 음식을 식료음식으로 보양식으로 먹었는지를 살펴보자.

조선시대 수라상 재현
<조선시대 수라상 재현>

(1) 죽 류

왕이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가장 대표적인 식료음식은 죽(粥)이었다. 본래 죽은 밥에나 면에 비해 초라한 음식이라고 여겨져 왔다. 그러나 왕들은 죽수라 라고 하여 아침에 자리에서 일어나 직후 먹는 초조반을 대체로 죽으로 들며 한 끼를 때웠다. 조선시대 궁중에서 가장 흔히 올리던 죽은 바로 아무 것도 첨가하지 않은 흰 쌀죽이었다.

쌀은 소화가 쉽고 가장 거부감이 없는 많은 사람들이 즐기는 식품이다. 이러한 쌀을 이용하여 미음, 응이, 암죽, 원미 등 다양한 형태로 만들어 설사나 이로 인한 탈수현상 그리고 소화력이 떨어 질 때 중요하게 이용하였다. 특히 청량미죽(靑粱米: 파란 빛깔의 차조로 쑨 죽)이 있는데 이는 약재로 사용하는 조의 일종인 청량미를 끓여 걸러서 찌꺼기를 제거한 후 만든 맑은 미음의 상태였다.

차 대신으로 먹을 수 있었고 갈증해소 및 기운 보강에 매우 효과적이었다. 반대로 오래 묵은 쌀인 누미로 끓인 누미죽(稷米飮)도 기를 보하기 위해 진어되었다.다음으로 많이 이용한 죽은 타락죽이었는데 이는 우유를 이용한 동물성 죽이었다.

현대 영양학에서 칼슘과 단백질이 풍부한 영양식으로 평가하는 우유를 이용하여 끓인 죽으로 육식을 금하지만 체력이 떨어지는 상중에도 애용되었다. 또 보통 죽은 뜨겁게 제공하는 음식으로 생각하지만 열이 심하거나 비위를 보할 필요가 있을 때는 타락죽을 식혀 차가운 상태로 올렸다.

이러한 개념으로 사용된 죽이 녹두죽이었는데 녹두는 한방에서 찬 성질의 식품으로 분류하고 있다. 종기나 열이 나는 증상에 열기를 다스리기 위하여 녹두죽을 진상하고 있다. 연자죽은 연근을 갈아 얻은 녹말을 우분(藕粉)이라 하는데 녹말에다가 멥쌀을 넣어 함께 죽을 쑤어 먹는 것이다.

약물을 복용한 후 연자죽을 연이어 섭취하여 원기를 북돋는데 활용, 산약가루를 첨가하여 효과를 강화하기도 하였다. 다음으로 산약죽이 있는데 이는 산약에다 멥쌀이나 혹은 찹쌀을 넣어 끓인 죽으로 중기(中氣)가 허하거나 설사가 심할 때 사용하였다.

율무죽은 이질이나 번열(煩熱:괴로운 열)에 사용하였다. 다양한 채소를 이용한 죽도 진어되었는데 특히 부추죽은 토혈증세에 좋다고 하였다. 요새도 흔히 먹는 흑임자죽도 대표적인 보양죽이었는데 기를 보하는 데에 가장 좋은 죽으로 애용되었다.

그리고 콩으로 끓인 태죽(太粥)도 있었고, 살구씨로 끓인 행인죽(杏仁粥)도 있었는데 이는 독특한 냄새 때문에 싫어하는 왕들도 있어 자주 진어되지는 못했다. 그리고 인조 9년 자전이 병이 들자 모주죽(母酒粥)이 붕어찜과 함께 오르는데 확실하지는 않지만 아마도 술을 이용한 죽으로 생각되고, 아니면 술도 몸에 좋지만 여성에게 올리기가 어려워 모주죽으로 불렸을 것으로 추측케 한다.

그리고 구선왕도고(九仙王道糕)라고 하는 음식이 진어되고 있다. 이는 비위를 조화롭게 하고 원기를 돋운다고 한다. 인조의 폐위의 허약을 보하기 위해 자주 진상하였고 영조도 노인의 비장이 약해진데 좋다고 하여 자주 올렸다. 구선왕도고는 떡의 형태이나 이를 갈아서 응이로 만들어 먹기도 한다.

이는 양반가에서도 많이 해 먹던 보양식으로 19세기 규합총서에는 이러한 죽에 관한 내용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주로 이용되는 재료에는 연육, 백복령, 산약초, 의의인, 맥아초, 능인, 백변두, 시상, 사당(설탕), 쌀 등이다.

(2) 탕류

탕은 전통 국물요리의 대표로서 왕실에서 가장 많은 종류가 전해진다. 이러한 탕류에는 몸에 좋은 식재료를 써서 만들어 보양식으로 이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말려서 봉으로 두드려 편 전복인 추복을 사용한 추복탕, 뱀장어를 써서 탕으로 만든 만증탕이 있다.

닭고기, 오이, 생선살, 표고버섯을 넣어 만든 과제탕, 닭고기와 닭육수에 깨를 갈아 넣어 만든 임자수탕, 닭고기와 달갈, 소고기, 버서, 채소로 만든 금중탕, 도미나 숭어네 채소, 소고기 등을 써서 만드는 승기악탕 등이 보양식으로 쓰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우리가 보통 보양식으로 생각하는 용(잉어나 붕어)과 봉(닭이나 꿩)을 사용하는 용봉탕과 삼계탕은 조선후기에 등장한다. 특히, 지금은 모든 사람들이 보양식으로 생각하는 삼계탕은 문헌에서는 찾아지지 않고 조선 말기의 음식상궁의 증언에서만 확인된다.(이조궁정요리통고)

(3) 약차와 음청류

술을 제외한 궁중의 음료수로는 뜨겁게 데운 것으로는 차가, 반대로 차갑게 식힌 것으로는 화채가 있었다. 약차는 한 두가지 재료로 끓인 차를 말하며 여러 가지 재료를 달인 약제(탕약)와는 다르다. 약방(藥房)은 원래 다방(茶房)으로 불렸었는데 차가 약제의 효과를 지니고 있었기에 구별 없이 사용되었던 것이다. 의관과 약방제조가 들어 영조의 오래된 숙증 치료를 위해 좋은 음식과 약차, 약물 등에 관한 얘기를 주고받는 내용이다. 약차에 관한 내용이 가장 많이 등장한다.

승정원일기에 기록되어 있는 다양한 약차들 중 가장 자주 진어된 차는 역시 인삼차이다. 현재도 세계적으로 가장 잘 알려진 한국보양차가 인삼차이듯이 조선시대 왕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곡기가 비위를 보한다면 인삼차는 기혈을 보하는 것으로 애용되었다. 그 외에도 지금도 많이 먹고 있는 생강차, 두충차, 감귤차가 자주 진어되고 있었다.

그리고 껍질을 벗기고 짚불 연기에 그을려서 말린 매실의 씨를 발라 버린 살로 만든 오매차(烏梅茶), 호추가루로 만든 호초차(胡椒茶)가 있었는데 이는 몸을 따뜻하게 해 주는 특성이 있었다. 열기를 식히는데 특효가 있는 금은화차(金銀花茶)는 침 맞은 후 생맥산과 함께 열 내리고 원기 보하는 약차로 우황가루를 섞어 진어하였다.

말린 칡으로 만든 건갈차(乾葛茶)는 풍한으로 학질이 된 경우 열 치료 효과를 높인다고 하였다. 마통차라는 재미있는 차도 등장하는데 제주도 어린 말이 겨울에 풀 먹고 눈 똥 말려 차로 마시는 것 눈을 밝게하는 효능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 송절차도 등장한다.

제호탕이 대표적인 궁중 보양차의 개념으로 등장하는데 이는 조선시대 궁중에서 으뜸으로 꼽던 여름철 청량음료이다. 제호는 우유를 정제하면 나오는 액체를 말하고 제호는 제호상미(醍醐上味)의 준말로 불교에서 비교할 수 없이 좋은 맛, 곧 가장 숭고한 부처의 경지를 의미하는 말로 쓰인다.

오매(그을려 만든 매실), 사인, 백단향, 초과 등을 곱게 가루를 내어 꿀에 버무려 끓였다가 냉수에 타서 마시는 대표적인 여름 전통차이다. 이 음식은 반가에도 애용되었는데 동국세시기에 의하면 조선시대 단옷날 궁중 내의원에서 이를 만들어 진상하면 임금이 부채와 함께 기로소(70세가 넘은 정이품 이상 되는 노인들이 들어가서 대우받는 곳)에 보내고 가까이 있는 신하에게도 하사하는 풍습이 있었다.

한국의 대표적인 청량음료로 오늘날에도 사랑받고 있다. 그리고 차 이외에도 식물성 재료로 만든 즙도 진어되었는데 배에다가 생강즙, 박하즙, 꿀을 넣어 중탕한 배즙으로 이는 가래나 기침, 천식치료에 효과적이었다고 한다.

(4) 주류

술은 ‘모든 약의 우두머리’ 라는 말이 있다. 술이 몸을 덥혀주고 몸 안을 두루 돌아 다니면서 약기운이 돌게 해 준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술이 과하면 오히려 ‘모든 독의 근본’ 이 된다는 말도 있다. 정신과 신체에 모두 혼란을 가져오고 장애를 일으킨다는 것이다.

초기 조선 왕들은 불교의 영향으로 기피하는 경향이 있었으나 그러나 건강을 유지하려면 밥과 고기 말고도 술을 빼놓지 말아야 한다는 인식이 있었다. 감선이나 철선을 하는 왕에게도 “술만을 드셔야 한다. 그래야 몸이 축나지 않으신다“라고 신하들이 권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술을 약주(藥酒)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궁궐에서는 소주와 청주인 약주를 상급으로 치고 탁주를 다음으로 썼다. 연회나 제사에는 청주만 쓰거나 청주와 탁주를 썼다. 이 밖에 소주에 인삼, 구기자, 오미자 등을 넣어 만든 약용주가 있었는데 약의 효과를 술의 힘으로 강하게 하려는 의미로 제조되기도 하였다.

알콜과 약재의 치료 효능이 어우러져 약효를 상승시키는 효과가 있었기에 상비약으로 쓰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조선시대에 자주 내려진 금주령으로 인하여 많이 만들어지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왕이 신하들에게 특별히 내려주는 술은 향온(香醞)이라 하여 귀하게 여겼다.

(5) 보양식류

약재가 중심은 아니지만 식품 자체가 가지고 있는 영양성분으로 인해 보양식으로 쓰였던 음식들이 많이 존재한다. 특히 눈에 띠는 붕어찜인데 이는 육찬을 하지 못할 때 어물을 활용, 죽과 함께 붕어찜을 자주 진어하였다.그리고 닭도 중요한 보양식이었는데 수증계라는 이름의 찜닭은 입맛이 까다로운 영조가 선호하던 보양식이었다.

그리고 조선시대 숙종 말년에 수라를 전폐하자 특별식으로 황자계혼돈을 진상했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이는 닭고기와 꿩고기로 만든 만두로 만두로서 소문사설의 저자 의관 이시필이 소개하여 숙수인 넉쇠와 이돌이 함께 배워 전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채소위주의 식사로 병이 난 경우의 왕족 보양식으로 골수(骨髓)음식 즉, 즙을 낸 음식이 이용되었는데 그 종류로는 우수(牛髓), 우양, 진계지속(陳鷄之屬) 등이 있었다. 또한 육찬을 진어하지 못한 경우 육즙으로 원기 회복, 사람 젖도 보양식으로 사용하였다.

녹혈이나 녹미를 먹는 경우도 있었는데 영조는 녹미를 특히 좋아하였다고 한다. 요새도 보양식으로 많이 생각하는 전복도 조선시대의 중요 보양식이었는데 생복, 숙복 모두 활용되었다. 생선회인 어회가 위에 좋다고 하여 진어되기도 하였다. 영조는 특히 소라에 관심을 가지고 먹을 수 있는지 묻기도 했다.

어란(연어알, 송어알, 명태알), 건어물도 보양식으로 활용되었으나 영조는 비린 맛 때문에 어선(魚膳)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그리고 굴을 이용한 굴 탕이 석화탕이라는 이름으로 애용되었다. 버섯종류로는 송이버섯이 보양식으로 이용되었다.

(6) 대표적인 식료음식, 전약(煎藥)

이는 우족이나 가죽을 푹 무르게 삶아서 대추, 계핏가루, 생강, 정향, 후추, 꿀 등의 재료를 넣고 함께 끓여 굳힌 후에 족편처럼 썰어서 만든 음식이다. 소위 우족의 젤라틴 성분을 이용해 굳힌 음식으로 전약은 달고 쫀득쫀득하고 맛있는 음식이면서 몸에 좋은 보양식이었다. 조선초기에는 오직 왕실과 고위 관료들의 건강을 위해 활용되던 음식이었다.

그후 일반 반가에서도 즐기던 음식이 되었다. 또한 조선 후기에 가면 전약은 중국의 사신들이나 일본인들에게 선보인 외국인들을 위한 접대음식으로까지 활용되었다. 승정원일기에 의하면 조선을 방문한 청나라 사신들 가운데 일부는 전약의 맛에 반하여 본국으로 가져가고 싶어 하는 이도 생길 정도였다. (승정원일기 효종 2년 10월 18일)

(7) 꿀과 사탕류

단 맛을 구하기 어렵던 조선시대에는 특이하게 사탕이 등장하는데 이는 입맛 돕고 비위 북돋는 음식으로 생각하여 치료용으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쓴 약을 먹을 때 함께 복용하기도 했다. 사탕은 18세기에는 중국에서 다양한 사탕이 수입되고 유통되었다. 그리고 꿀은 역시 중요한 식료음식으로 약(藥)자 붙은 음식에는 대부분 꿀이 들어갔듯이 식료를 위한 대표적인 식품이었다.

♣ 소선(素膳)음식

조선 왕실의 중요한 식료음식의 개념 중 하나가 소선음식이었다. 왕실의 식료음식이란 우리들이 흔히 생각하듯이 단백질이 풍부한 보양식 뿐 아니라 채식위주의 소식도 식료음식의 하나로 중요한 역할을 하였음을 간과하면 안 된다. 소선이란 일반적으로 깨끗하고 위생적인 것으로 나타내는 개념으로 불교에서는 생명이 있는 것을 죽여서 만든 것이 아니라 생명이 없는 것(곡물, 채소, 해초류)으로 만든 음식으로 볼 수 있다. 조선시내 왕실에서도 유교식 제사에서는 소선을 섭취하여 깨끗한 몸 상태로 만든 다음 조상신께 제사를 올렸다고 한다.

또한 인조21년에는 (1643)에는 명나라에서 사신이 왔을 때에 상중이었는데 왕은 물론 사신에게도 식물성의 소선이 진상되었다고 한다. 다시마로 만든 편증(片蒸), 녹두가루로 만든 국수(麵), 의이로 만든 죽(粥), 두부로 만든 숙편(熟片), 연두부로 만든 탕(於音), 대추, 밥, 홍시, 수박, 배로 구성된 실과(實果), 건정과(乾正果), 약과(藥果), 잡과(雜果), 나물로 만든 숙채(熟菜), 밀가루와 두부로 만든 상화병(床花餠), 찹쌀과 실 산삼으로 만든 산삼병(山蔘餠), 녹두와 참기름으로 만든 녹두병(綠豆餠), 두부와 석이버섯으로 만든 간남(肝南)이 찬품단자가 되었다고 한다(김상보, 조선왕조궁중의궤음식문화,1995, 66). 물론 식치단자는 아니었지만 찬품의 구성을 보면 음식이 곧 자연이라는 음식관을 잘 보여주고 있고 더구나 현대인을 위한 최상의 건강식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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